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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jung KIM May 09. 2019

방심형 인간

'결심'이 아니라 '방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야 그 틈으로 시도 찾아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열린 마음속으로 타인들의 곡절이 흘러 들러온다. _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중에서


 인생의 많은 일들이 결심을 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습관적으로 결심을 하며 살았다. 이걸 잘해야 하고, 이건 절대 잊지 않아야 하고, 저건 신경 쓰지 말고... 그야말로 '결심(과 실망)을 반복해온 인생'이었다.  

 첫 번째 중대한 결심은 첫 회사에 입사하던 시절로 기억한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서 채권자들을 피해 부모님은 단칸방으로, 나는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충격에 빠진 부모님을 챙기려면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라는 결심을 했던 것 같다. 남동생과 나는 즉시 '변제 모드'로 들어갔다. 친구들과도 연락을 다 끊은 채, 나는 회사 일과 주말 아르바이트만 하며 지냈다. 일로 인정받고 싶었으나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 때문에 늘 열패감에 시달렸다. 일기장에는 풀 데 없는 좌절감과 슬픔이 쌓여갔고, 수많은 결심도 함께 기록되었다. 시나 소설은 읽지 않았다. 그때의 나에겐 자기계발서의 긍정적인 문구들이 더 간절했다.

 어느 날 회사 대표번호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지인들과 연락을 다 끊고 지내던 시기였는데 도대체 누가 나를 찾는 걸까,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만큼 경직되어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잘해야 해. 그런데 왜 넌 그것밖에 못 해?' 이 생각을 무슨 주문처럼 습관적으로 하며 살았다. 그러던 차에 회사를 옮겼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닥달하며 못살게 구는데 사장님과 팀장님이 나를 믿어주었다. 조금씩 내 안의 다른 가능성들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감도 찾았고 몇 번의 고비를 넘겨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미정 씨는 너무 잘하고 있다"고 믿던 그들이 "알고 보니 실력이 없더라"라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계속 결심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피곤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결심을 하고 또 결심을 하며 사는 일은. 진짜 피곤했다.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는 것인지 나 혼자서는 알 수가 없었다.

 

 회사를 나와 번역 일을 하며 서점을 운영하는 일은 방심을 배워가는 과정인 것 같다. 간혹 행사를 준비할 때면 예민한 회사형 인간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나는 느슨하게 나를 열어놓고 방심할 때 찾아오는 일들을 만나는 중이다.

 덕분에 요즘은 결심을 하고 이루지 못해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은 줄었다. 대신 다소 한심한 방심형 인간이 되었다.

 어라, 방심하다 돈이 다 떨어져버렸네. 방심하다 또 누가 좋아져버렸네.  

 최근 이 두 가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방심하다 예측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얼마 전 안도 타다오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중국 현지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이 건축가는 코미디언 같은 얼굴로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실패하면 사과하면 되지 뭐."

 옛날의 나였다면 그 말을 듣고 화를 냈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이렇게 발버둥치고 있건만, 그의 유연한 태도와 웃음이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어적으로 느꼈을 테니까. (안도 타다오의 노력과 완벽주의적 태도를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재미 있는 실패'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참 좋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을 소개할 때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각종 공모전에서 떨어진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와 자신감을 보면서 나도 그런 맷집을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수한 결심을 하던 과거의 나여, 노트 가득 빼곡히 결심을 적던 나여, 이제는 안녕. 나는 최대한 느슨하게, 방심하며 살아가련다. 나의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엔 많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모른다. 모르겠어. 인생의 1/3을 결심하며 살아왔으니 1/3은 좀 방심을 해도 되지 뭐. 그때 가서 아닌 것 같으면 남은 1/3은 다시 결심을 하며 살아가자. 일단 지금은 이렇게 가자고.(이것도 결심이네, 허허. 아직 연습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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