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기분들 4
손님과 대화를 나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해외 출장 몇 번 다녀오니 한 해가 다 갔다는 그의 말에, 나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가 말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을 덩어리로 받아들여서 더 짧게 느껴지는 거라고 합니다. 슬픈 일이죠.”
시계에서 흘러나오던 초침 소리가 일순 멈춘 것 같았다.
“어릴 땐 뭐든 신기해서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데, 그걸 다 뭉뚱그려 받아들인다는 건가요?”
“뇌가 시간을 인식하는 형태가 달라진다고 하던데...”
“아, 모르는 길을 처음 갈 때보다 돌아올 때 훨씬 짧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일까요? 돌아오는 길은 이미 익숙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나?”
이 ‘덩어리 시간’ 개념에 나는 꽤나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맞아맞아. 소중한 기억일수록 모든 장면이 세세하게 기억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꿈꾸던 일을 앞두고 있을 때, 보니를 바라볼 때 매 순간이 정지화면처럼 캡처되어 뇌라는 사진첩에 담긴다. 문제는 요즘 들어 하루가 뭉텅이로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는 거다. 낭패다. 저녁 6시쯤 되면 하루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시간 인지를 다룬 책 <시간 컨트롤>에서 장 폴 조그비는 뇌가 시간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동일한 시간이 왜 어떤 순간에는 길게 느껴지고 어떤 순간에는 빠르게 느껴지는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시간의 비밀을 들려준다. 그런데 시간 왜곡을 다룬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시간 경험에는 인간의 개인적 특성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 즉 내성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뇌의 내부 생체시계가 각각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실은 오늘 아침, 원서검토 일을 하나 거절한 참이었다. 어젯밤 검토서를 마감한 데다, 이번 주에는 나북스와 글쓰기 수업, 보도자료 작성과 다이어리 발송 작업이 있어 여유가 없었다. 지난주에는 한번 보자는 친구들에게 당분간은 바빠서 힘들 것 같다며 12월을 기약했다. 프리랜서로서 마감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터라, 일을 계획할 때면 미리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 편이다.(중간에 온갖 일들이 끼어들 거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런 스스로를 보며 막연히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실제로 내성적인 사람들의 내부 생체시계가 더 빨리 흘러, 하루를 더 짧게 느낀다는 것을 알려준다.
내성적인 사람의 정신적 각성 수준이 높다는 말은 감각 정보 처리 속도와 정신적 스냅사진의 기록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빠르다는 의미다. 이 말은 또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내부 생체시계의 똑딱임이 더 빠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
루이지애나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내성적인 사람은 일과를 계획할 때 한 시간이 15분 더 짧게 느껴 하루를 더욱 짧게 여긴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관리할지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외향적인 사람은 내부 생체시계가 느려 매 시간마다 17분씩 추가 시간이 있다고 느껴 하루를 더 길게 생각한다. 이 느낌 덕분에 그들은 느긋한 마음을 갖고, 남은 시간이 풍부하다고 생각한다(전망적). 그들은 거의 모든 일에 여유가 있고 서두르는 법이 없다. 또 외향적인 사람들의 느린 내부 생체시계는 왜 그들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지도 설명해준다. __장 폴 조그비, <시간 컨트롤>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나 자신에 대해서, 주변의 느긋한 지인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도 우리 몸속에서는 각자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성격은 여러 측면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속도에 영향을 준다. 만약 당신이 내성적인 사람, 아침 종달새형, 참을성이 강하고 자제력이 있는 사람, 쉽게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 많은 걱정을 하는 사람에 해당한다면 뇌의 내부 생체시계는 빠르게 움직인다. 그 결과 어떤 일을 하느라 보낸 시간을 떠올려보면(회고적 시간 경험), 시간은 느리게 흐른 것처럼 보인다. 이는 뇌가 외부 세상보다 내부적인 일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일을 앞서 계획할 때면(전망적 시간 경험) 내부 생체시계의 속도가 빨라져 미래에 끝내야 하는 일을 계획할 때 쓸 시간이 적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_장 폴 조그비, <시간 컨트롤>에서
그렇다면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마시멜로맨처럼 둥둥 떠다니며, 내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에 익숙해진 뇌에 참신한 기억을 집어넣는 길밖에 없다. 내가 평소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서점, 연희동) 바깥으로 더 자주 나갈 일을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 부암동 밤길을 한참 걷고 와서 모처럼 단잠을 잤던 걸 기억한다. 평소 낮에만 들렀던 부암동의 밤공기는 전혀 낯설어서, 묘하게도 다른 도시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간간히 뿌리는 빗줄기 속을 걷다가, 불을 밝히고 있던 스콘가게에 들어가 빵 냄새를 맡고, 상견례의 전당이라는 하림각을 지나며 마음껏 웃는 동안, 새로운 소리와 사람, 맛, 색깔과 냄새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그때 시간이라는 마시멜로를 조금씩 뜯어먹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맛이었다. (밤의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