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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다다 Mar 30. 2021

다시 시작

돌아보면 나는..
늘 꿈을 꾸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시니컬한 표정을 하면서.


내가 음악치료를 접했던 건 십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중3 때 장래희망란에 음악치료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오려준 신문 스크랩의 내용이 생각나서다. 아,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이 있구나. 나는 피아노를 잘 치니까(혼자 생각으로) 그리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냥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내 장래희망은 기자가 되었고 (대체 나에게 무슨일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한민국의 많은 청년들이 그렇듯 나에게 제대로 탐색해보지도 못하고 전공을 정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편이었다. 사회과학부에 소속되어 1년동안 이전공 저전공을 들으면서 마음껏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심리학의 이해에서 c+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심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왜냐면 가장 애매한 전공이었으니까. 이 전공이면 많은 직업군을 커버할 수 있을거라 믿었으니까. 그리고 나에겐 보험같은 음악치료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정치외교라던가 경제학 같은 다른 전공은 더더욱 나랑 맞지 않았다.


2학년이 되었고, 나는 용케 기자가 되고싶다는 꿈을 복기해서 언론정보학과로 복수신청을 했다. 나의 무기는 오랜 글짓기학원생활과 논술훈련덕에 글을 나쁘지 않게 쓴다는 것이었고 쓸데없는 분노가 많다는 것이었다.학점도 나쁘지 않았는지 다행히 잘 되었다. 학점이 나쁘지 않았던게 문제였다. 그결과 나는 심리학과에서도 아싸였고 언론학과에서도 아싸였다. 단 한명의 심리학과 절친은 영어교육과로 전과를 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나는 기자 혹은 피디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치료의 망령이 자주 나를 따라다녔다. 한 학기 교양수업은 이미 들어두었다. (다행히 내가 다닌 대학엔 대학원에 음악치료학과가 있었으므로) 나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3학년이 끝날 무렵 휴학을 하면서 어학연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학교 화장실에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문앞에 잔뜩 붙여진 광고지 하나가 들어왔다.

"대학원생 논문을 위한 음악치료세션에 참여하실 분을 찾습니다."

그리고 쓰여진 조건이 바로 나였다. 나는 뭐에 홀린듯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8회의 음악치료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받았다.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도, 어떤 회차에 펑펑울지도, 그렇다고 내가 엄청 달라진 것 같지도 않았다 (음악치료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그 경험이 그때 위태로웠던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음을 알았다.) 좋은 경험으로 한쪽에 묻어둔채 그렇게 나는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렸다. 음악치료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오십 쯤 되면 해야겠다. 지금 나는 더 치열하게 살 것이다. "본인이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음악치료를 하는 건 조금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진로상담을 요청했던 교수님이 나에게 해주신 한 마디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달리게 만들었다. 나는 화려하게 주목받으면서 살고 싶었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나는 출판사에서 막내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의 시간은 사실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열심히도 살았다. 다큐멘터리도 찍어봤다가 독립영화판에도 기웃거렸다가, 공채방송국시험도 준비했다. 나중엔 이것이 내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하여간 그때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꿈"들이 좌절되고 내가 도대체 내일 어떤 모습으로 살지 상상도 되지 않는 불확실한 백수의 삶. 그랬기에 직업인으로 산다는 게 행복했었다. 그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고 해도.화려, 주목과는 거리가 먼.. 누군가를 주목받고, 화려하게 만드는 일에 가담하는 일, 심지어 어떤 회사에선 내가 만든책에 내 이름을 넣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삶. "누구나 그렇게 살어. 자기 전공살려서 사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니. 그래도 너는 니가 하는 일 재밌게 하는 것 같아." 등등의 말들은 더이상 나를 짓누르지도, 상처를 주지도 않았는데 왜냐면 그냥 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고, 9-6로 사는 삶임에도 2시간 남짓의 통근시간을 거쳐 8시쯤 저녁밥을 먹고 한숨을 돌리고 나면 나는 그냥 또 잠을 자고 다시 7시에 헐레벌떡 만원지하철을 타고 또 손잡이도 없는 광역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렸다. 


그런 날들이 있다. 내가 부품 같이 느껴지는 날들.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일을 한 사람들이 당한 일들이 미래의 나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날들. 옆 팀의 과장급 이상의 두 명이 해고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고, 다음 달부터 전 회사 직원들의 월급이 조금씩 올랐다. 이별의 말을 하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뭐라도 같이 해보자고 말은 꺼냈지만, 결국 나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내가 회사를 곧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첫 번째 계기였다. 신나게 제입맛에 맞는 부품들을 갈아끼우던 대표는 그 해에 경영을 잘했다고 주는 상도 받았다. 나는 더이상 주인공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이런 기분만은 안 들고 살 수 없을까. 정답은 모르지만 해야 할 일은 분명했고 나는 몸은 편안해도 마음이 불편한 이곳을 일단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 다시 시작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야." 이미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한국에서 정말 실현가능한 일일까? 4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 그렇다고 과거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지만, 4년 동안 내가 낯선 곳에서 맞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반갑게 초대할 수도 없는 그런 여정..  게다가 나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이제 겨우 수습떼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9살이? 게다가 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고? 딱 1년 6개월 출판사를 다녀서 돈 천만원을 모았다. 동갑내기 영국유학생과 결혼을 했고 다시 내게 숙제가 내려진 것이다.


"영국에서 뭘 할 것인가?"


모든 가족들이(동거인 포함) 나에게 하고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다. 그동안 하기 싫은 걸 별로 한 기억이 없었다. 단편영화판에도 기웃거리고, 방송사 시험도 봤다가, 우연히 흘러간 출판사 편집자 예비학교 덕분에 아는 사람은 안다는 출판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조금씩 타협했더니 지금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생이 그렇듯 좋은 사람들만 있는건 아니라서 결국 다수의 이상한 사람들(사실은 나랑 안맞았다는게 더 맞을지도)이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이유였지만 말이다. 혹자들은 많은 이들이 그렇듯 결혼+해외 이주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서 결혼한 게 더 맞는 것 같았다. 뜻하지 않게 팔자좋은 고민이 나에게 떨어졌다.


"뭘 할 것인가?"


그리고

일년이 지나, 나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대학원의  음악치료학 석사 15명 중의 한 일원이 되었고 2년이 지나 나는 12명과 함께 그저그런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친구들은 서로에게 말해주었다. "We survived!" (살아남았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정말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무작정 한번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서 영국에 아는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보통 이런 경우, 나는 드라마틱하게 희망적인 결말을 본일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교수님은 몇 주전에 영국에 오셨다가 이분을 만난적이 있으셨고, 나에게 반갑다는 말씀과 함께 정말 드라마틱하게 이 분을 소개시켜주셨다. 일면식도 없던 귀인께서는 나에게 본인의 음악치료여정은 지금생각해도 너무 행복한 과정이었다고, 분명 길이 있을거라고 믿도끝도 없는 용기를 주셨다. (그런걸 잘 안믿는 편이지만, 결과적으론 긍정의 힘?) 그때 생겼던 또 다른 호기심. 도대체 이게 뭐길래?


일단 해보자 하고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덜컥 오디션을 보라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그리고 인생을 탈탈 털리는 것 같은 1-2시간 남짓의 인터뷰와 오디션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리고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더더욱 음악치료를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원래 거주하던 영국 남부에서 그나마 가까운 대학들에 지원했다가 단 하나의 대학만이 나를 '유일'하게 선택해주었다. 가보니 15명 중에 동양인은 나와 대만친구 두 명이었다. 대부분 에딘버러 근처에 사는 유럽인들이었다. 동양인들이 내야하는 학비는 유럽피안의 거의 두 배였기에 나는 학교가 돈 때문에 혹은 쿼터제 때문에 나를 뽑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완전히 다른 새 삶이 나에게 주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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