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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Nov 05. 2018

19_책을 읽는 삶*

하와이 편

하와이에서 반년,

중미에서 한달, 한국에서 반년.

생계형 직장인이

1년간 놀면서 되찾은

77가지 삶 이야기.



지금껏 제가 읽은 책들 중 대부분은 대학생 때 읽었던 것들입니다. 그땐 일 년에 백 권씩 읽었고 독서모임에 참여할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카피라이터가 된 후로는 도통 책을 읽지 못했는데요. 바빴던 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얼른 일에 능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독촉하는 신입사원 특유의 조급함 때문에 현업과 관련 없는 행위는 전부 한가한 일처럼 느껴졌고, 카피를 잘 쓰고 싶은 의욕이 책이든 신문이든 모든 텍스트를 볼 때마다 여기에서라도 아이디어 팁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해 활자를 읽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5년 전쯤 출근길 지하철에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방송 1회에 소개된 <7년의 밤>과 <고래>를 직접 읽고 싶어서 퇴근하자마자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갔고, 밤 열한 시까지만 읽고 자야지 했던 결심은 책을 펼치는 순간 무너져 버렸습니다. 한 장만 더 읽자, 한 장만 더 읽자 하다가 결국 밤을 꼴딱 새 버렸지요.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책에서 뭔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저 읽는 게 즐거웠던 게. 독서의 순수한 재미를 되찾게 된 순간이었지요. 책이 제 삶에 다시 들어오자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인 데도 왠지 모르게 신이 나고 기뻤습니다. 매일 무채색 옷만 입다가 파스텔 톤 옷을 입고 나간 날의 하루처럼 마음의 분위기가 달라졌지요.  


살면서 책 읽기가 성적을 올리는데 도움을 줬다든가 좋은 카피를 쓸 수 있게 즉각적인 영감을 줬다든가 하는 혜택 따윈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만의 감수성과 생각하는 스타일은 제가 읽은 책들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거 같아요. 책은 즉효약보다는 보약과 비슷해서 인생 어딘가에서 책의 부분 부분들이 조용히 힘을 내고 있달까요.


하와이 주립 도서관
도서관 만화책 코너


하와이에서 저의 단골집은 단연 도서관이었습니다. 와이키키 도서관과 다운타운에 있는 주립도서관에는 영어로 번역된 일본 만화책 코너가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하굣길에 만화방에 들르는 기분으로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렸지요.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서의 추억이 많습니다. 거주민은 무료(관광객은 30불)로 만들 수 있는 도서관 카드를 공짜로 발급받고선 마치 현지인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무척 기뻤던 일. 매일 만화책만 빌리는 저를 10대로 착각하고선(전 30대 중반입니다.) 도서관에서 열리는 틴에이저 행사에 초대한 아주머니. 저에게 신간 만화책이 막 들어왔다고 제일 먼저 귀띔해준 도서관 사서. 그 신간을 버스에서 읽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습관처럼 들른 도서관에서 깜짝 음악회가 열린 날.


중학교 때 읽었던 슬램덩크도 20년 만에 하와이에서 다시 읽었습니다.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채소연, 정대만, 송태섭, 윤대협, 안 감독님 같은 캐릭터 이름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데 스토리는 완전히 까먹어서 왜 강백호와 서태웅이 앙숙이 되었는지, 왜 강백호는 소연이를 짝사랑하게 되었는지, 왜 그 많은 캐릭터 중에서 나는 윤대협에게 가장 끌렸었는지도 전부 잊어버렸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아.. 얘네들이 전국 대회에 출전하려고 그 난리를 쳤던 거구나. 대박, 4개월 동안의 농구부 이야기를 6년에 걸쳐 그린 거였어? 하며 새삼 놀라게 된 부분도 있었고, 내가 이래서 윤대협을 가장 좋아했었구나, 다시 봐도 역시 윤대협이네! 하며 변하지 않은 저의 취향을 발견하기도 했지요. 완결에 가까워질수록 심하게 웃기고 짠하고 쫄깃해서 책을 오른쪽으로 누워서 봤다가 왼쪽으로 누워서 봤다가 앉아서 봤다가 엎드려서 봤다가,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며 밤새 슬램덩크에 앓아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와이에서 읽었던 수많은 만화책들은 저의 하루에 힘차고 귀여운 에너지를 주었지요.



"왼손은 거들뿐"


예전에 신문에서 보았는데요, 나이가 들수록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예를 나이가 들면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과 같은 ‘소소한 경험에서 얻는 행복’이 해외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험에서 얻는 행복’만큼 크다고 하네요('Journal of Consumer Research' 논문 中). 그러고 보면 나이 드는 것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구나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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