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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야민의 안경 Oct 20. 2023

[서평] 과도한 부

병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세상을 강타한 후 사람들은 보건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다. 의료의 분과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엄청난 수의 확진자가 나오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고 교육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가능한 교육을 구상하고 시행하였다. 이런 변화들은 위기에 봉착하고 그 위기를 직접 느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살아가기 위해서 직면해야 할 과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그들의 노력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여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이런 일은 사실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경제학자이자 심리분석가인 마르틴 쉬르츠Martin Schürz의 책 『과도한 부』도 이런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쉬르츠는 현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에 대해서 다룬다. 양극화를 넘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그런 부를 가지고 있는 특정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게다가 시민들의 권력의 근원인 정치적 힘이나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그런 특수한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기막힌 사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는 이런 '과도한' 부자들이 존재함으로써 사회가 병든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터부시 되는 현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꼬집어 낸다. 쉬르츠는 이런 우리 사회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과도한 부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과제는 정치적인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이하게도 쉬르츠는 경제문제를 다루면서 끊임없이 플라톤, 칸트, 토크빌, 디킨스 등 소위 경제전문가들에게 생소하게 여겨지는 이들을 소환한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경제 문제에 접근할 때, 어떤 사람도 규범성 관한 문제를 비껴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회에 성장을 가져와야 한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사회의 총생산량을 따지기 위해서 GDP와 같은 수치를 선별하여 찾아볼 것이다. 만약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지니 계수를 찾아볼 것이다. 어떤 경우건 경제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경제의 지표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규범적 질문, 즉 정치적 질문이란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쉬르츠가 경제 문제를 해결할 난관을 먼저 규범적인 문제에서 해결하는 것은 적절한 시도인 거 같다.


 존 롤스도 또한 그런 문제에 천착한 사람이다. 존 롤스는 사람들이 과도한 부에 집중되는 사회적 혜택에 비해 빈부층에 대한 사회적 혜택이 너무나 적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우리 사회의 책임이기 때문에 정의의 관점에서 수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쉬르츠는 이런 롤스의 정의의 관점을 일부 수용한다. 하지만 롤스의 '정의'의 심각한 문제점은 그것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롤스의 '정의 원칙'은 고도로 추상적인 관점이다. 말하자면, 정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감되지 않는다. 그런 정의의 감수성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특수한 사람들일 뿐이다. 쉬르츠가 요구하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지닐 수 있는 역동성이다. 쉬르츠는 이것을 분노하는 감정에서 찾아낸다. 분노하는 감정은 사람들이 과도한 부의 문제점을 선명하게 볼 때,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그런 감정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게 된다면, 이것은 정치적 운동이 된다. 물론 롤스의 추상적인 '정의' 개념도 이런 '분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명히 '분노 감정'은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잠재력 속에 내재한 위험성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누스바움은 이런 '분노'의 감정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분노'하지 말고 타인을 '연민'하라 권고한다. 하지만 쉬르츠는 '분노'에 내재한 위험성보다 '연민'에 내재하는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이 그런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 쉬르츠는 그런 '연민'은 소수의 사람만이 사회의 대부분의 혜택을 누리는 이런 상황을 묵인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 내재한 질병은 생각보다 더 고치기 힘들다. 쉬르츠가 바르게 보았던 것처럼 이런 문제를 타계할 유일한 방법은 잠재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조직하는 정치적 운동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 만이 여러 난관들 속에서 우리의 미래에 관여할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그런 권한을 갖는 것도 아니고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 만이 그런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권한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담아 행위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르츠가 그런 정치적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분노'의 감정에 기대는 것은 나로서 납득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분노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적 행위는 정당성과 적법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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