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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현주 Sep 03. 2020

기억을 대필합니다 1

내 기억이 다 하기 전에

"손 아래 시누가 정신 줄을 놨어. 딸애를 낳아놓고 젖먹이가 울어 제끼는데 실성을 해 자꾸 집 밖을 뛰쳐나가더라고. 애가 불쌍해 내가 자주 젖을 물렸지. 그 애가 역삼동 사촌누나야." 심청전에서 강남으로 시공간을 넘은 사연. 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시어머니의 기억을 대필한다. 어머니는 1924년 생. 수원사람인데 스물 갓 넘어 인천으로 시집와 평생을 사셨다. 돌아가신 지 3년이고 내가 저 얘기를 들은 건 30년 전인데 토씨 하나 안 빠지고 불러낼 수 있다. 나는 기억 대필자.


만삭인 시누이가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려고 부엌에 들어갔다. 여름이라 상시 아궁이에 불이 있는 게 아니라 불을 때야 했는데 지피려고 했더니 어마어마한 굵기의 구렁이가 기어 나왔다. 어머니는 오른팔을 들어 올려 "이~이만한 구렁이가 스르르 나왔다"고 하셨다.  젊은 여인은 골이 빠져나갈 만큼의 충격을 받아 그만 정신이 나가, 아니 미쳐 버렀다. 그 상태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고 자식에게 젖을 물려야 할 어미가 혼자 중얼거리다가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지켰지만 어느새 집 밖으로 나가면 마을을 돌며 찾아 나서야 했다. 어머니도 불쌍한 시누를 찾아 동네를 헤맸는데 한 번은 동네 뒤 쪽 우물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더란다. 안을 들여다보니 시누가 물 위에 앉은 채로 동동 떠서 퉁퉁 손바닥으로 물을 치면서 깔깔거리고 있더란다. 이 대목이 무서운 이유는 그 우물이 깊었다는 점.


별 용쓰는 재주를 다 부려도 병이 낫지 않자 집안에서는 굿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유명한 만신을 불러 큰 굿을 하기로. 굿이 크면 준비가 길다. 며칠에 걸쳐 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다. 안마당에 천막을 치고 멍석을 펴고 상다리 부러지게 온갖 음식을 다 쟁이고 스탠바이. 그런데 굿 할 무당이 문 안에 고개만 넣었다 들어오지도 않고 굿을 못하겠다 했다. 사연인즉, 떡시루 위에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애기가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따딱 하면서 놀고 있다고, 저렇게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너무나 무서워서 굿을 못하겠다고.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랗다면 서양인인데 1940년대이니 한국 시골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외국인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생각은 이랬다. 시누네 시댁이 당시 그 동네에서는 드물게 천주교 집안이라 아마 예수를 믿어서 굿을 못하게 하느라 서양 귀신이 왔다고. 깊은 우물에 사람이 떠있었다는 목격담, 떡시루에 서양 아기가 올라앉아 있었다는 전언이 생판 구라이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인데 이를 놓고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하지 않았다. 며느리로 예를 갖춘 게 아니라 너무나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파워가 있다. 우리의 기억을 자극시켜 단번에 장기 기억으로 넘겨버리는 힘. 그래서 같은 역사라도 교과서로 배우면 생각 안나도 소설로 읽으면  아는 것. 교육자라서 제 버릇 못 버리고 하는 말인데 아이들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기억공고화를 위함이다.


추신: 시누이는 얼마 후 유명을 달리했고 그 딸은 잘 자라서 부잣집 사모님이 되셨으니 감사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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