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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현주 Sep 11. 2020

기억은 가진 자가 갑

억울한지고. 아이가 자기는 학원을 많이 다녔다네. 내 아이는 딱 4년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초등 5학기, 중등 3학기 정도. 한국에 있었던 5학년에서  중등 가기까지는 고난의 학업 따라잡기 시간이었다. 사교육이 다급했다는 뜻. 딱히 신념이 있거나 무지해서는 아니고 나는 정형화된 조기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그 증거로  5 이전 아이는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 연산 학습지를 안 시켰고, 국어인가 뭔가 방문 학습지 조금 하다 하다 때려치운 게 다. 초등 가기 전 코 앞에 초등학교 병설 어린이 집 6개월 2시까지 간 것, 그 후 아이는 정식(?) 유치원 밥 먹듯 결석하면서 1년 다닌 것이 정식 교육 이전의 기록.


초등 입학 후 1학기 마치고 미국에 갔기에 그야말로 이 녀석은 사교육을 받은 게 없다. 미국에서는 사교육이 없었기에 넘겼고 5학년에 귀국해 보니 수학이 너무나 앞서 있어 문제였다. 나만 답답할 뿐 아이는 생판 모르겠는지 그다지 안달도 안 했다. 억울한 이유는 이때 수학학원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보냈는데 아이가 자기는 한국에서 학원을 많이 다녔다고 기억한다. 아, 영어를 잊는 듯 해 몇 개월 다니다 하도 영어교육이 희한해 중단한 게 있구나. 그걸 두고 학원을 많이 다녔다고 기억 갑질을 하다니. 졸지에 극성맞은 엄마가 된 나.


실제 극성은 미국 대입 위해 아이 고등학교 시절  두 해 여름에 떨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아이는 여름에만 우리 곁에서 있었는데 당시 부산에 살 때라 변변한 SAT학원을 위해 강남을 가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외갓집 신세를 져야 했다. 외가가 강남 옆 동작구이고 지하철로 다니면 되는데 문제는 애 애비였다. 방학 있는 직업을 가진 남편이 긴 여름 모처럼 한국에 와있는 자식을 서울에 두고 혼자 부산 집에 남을 리 없었다. 그러면 친정 노인들이 딸네 세 식구를 세 달 거두어야 될 상황. 입맛 까다로운 손자와 사위가 감당이 안되니 현명한 친정엄마는 강남에 오피스텔을 몰래 단기로 얻어주셨다. 말하자면 내쫓은 것. 속도 모르는 아버지는 집 놔두고 오피스텔 간다고 여름 내내 섭섭해하셨다.


팔자에도 없는 강남 유랑을 했다. 단칸방에서 처음에는 아들과 둘이, 나중에는 남편이 합류해 셋이. 잠만 잔 게 아니었다. 계속 사 먹을 수 없으니 장을 봐서 간단하게 해 먹었는데 그 고충이라니. 트렁크 만한 냉장고와 한 구짜리 스토브로 세 식구가 밥을 한 끼 내지 두 끼를 먹는 신공을 부렸다. 주중 낮에는 아이가 나가 있으니 (애비가 아니고 애가) 부부가 동네를 전전했다. 그나마 다락방 같은 2층이 있어 요기조기 나눠 잤는데 주말이 문제였다. 수업이 없는 구척장신 고딩이 코딱지 소파에 버티면 남편과 나는 있을 곳이 없었다. 할 수없이 주말에는 친정으로 갔는데 아이는 외가에 들어서면 마룻바닥에 대고 김밥 말 듯 제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넓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 나의 극성에 아이는 시달린 기억이 없이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부산 태생인 아이는 대도시 모던 끝판왕인 해운대에서 자랐건만 강남 토박이 유학생들과의 교류로 배우는 멋짐(?)에 빠져 강남애 보다 더 강남스러운 애가 되었다. 하루에도 수백 단어를 외우고 수백 문제를 풀던 입시학원 생활이 고되지 않았는지 그때의 시간을 투덜대지 않고 나름 재미있었다고도 한다.


기억이 아무리 제 녀석 거라지만 미국에서 자란 초등시절을 기억하기 바란다. 내가 내 공부로 정신없이 바빠도 아이가 푸른 잔디에서 축구하게 했고, 수영장에 담가놓았으며, 눈 시리게 붉은 단풍을 헤치면서 피아노 레슨을 데리고 다녔다. 주 1회 운동 하나 피아노 하나였지만 내 형편에도 내 시간에도 버거운 일이었다. 내게는 버거웠으니 그 값으로 녀석에게는 좋은 기억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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