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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둥대는금붕어 Jun 12. 2021

그 애 혼자 집으로 가는 길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기가 막힌 삶이 있다. 권여선의 ‘봄밤’ 속 영경과 수환이 그렇다. 류머티즘 환자 수환을 간호하는 영경 역시도 심한 알코올 중독 환자이다. 이들은 각자 한 번의 이혼을 겪은 뒤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서로를 만났고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남아있는 게 놀랍고 의아하다고.

 영경은 날이 갈수록 알코올에 의존하고 결국 수환이 죽는 날 곁을 지키지 못한다. 그날, 수환의 곁에는 종우가 있다. 봄밤에서 조연도 못 되는 종우지만 그가 말하는 소연이가 잊혀지질 않는다. 은경이를 좋아했지만 직진할 자신이 없어 비겁하게 은경이의 친구 소연이에게 접근한 종우. 둘 사이에 질투가 나 종우를 건드린 은경이. 종우가 은경이와 사귀기로 하고 소연이에게 헤어지자고 한 날, 소연이는 코피를 흘린다. 이유가 뭐냐고 묻지도, 울지도 않고 코피만 쏟는다. 그 기세가 너무 매서워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종우는 소연이를 기억한다.



“내가 은경이랑 사귀기로 하고 소연이한테 헤어지자고 얘기했을 때, 와, 나 진짜 쫄았거든요. 소연이 걔가 막 울고불고할 줄 알았는데 전혀 울지를 않더라고요. 눈은 막 울 것 같은데 끝까지 울지를 않더라고요. 그냥 알았다고, 헤어지자고 그러는데 혹시 얘가 그동안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나 싶어서 겁나기도 하고 또 징징거리지 않아서 잘됐다 싶기도 하고, 암튼 이상했어요. 집에 간다길래 택시 잡아주려고 서 있는데 갑자기 얘가 코피를 쏟는 거예요. 난 세상에 그렇게 무섭게 코피 쏟는 거는 처음 봤어요. 그 밤중에, 아무 짓도 안했는데 코피가 그냥……”


 기가 막힌 삶은 여기에도 있다. 말도 안 되게 외로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코피나 쏟아내고 마는 소연이가 있다. 소연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종우가 좋아한 것은 은경이라는 것을. 그래도 자기와 만나는 동안만큼은 종우도 어느 정도 자기에게 진심이었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게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에 슬프다. 처음부터 알았기 때문에 울 수도 없었다. 눈을 뒤집고 쓰러질 수도 없고 종우에게 소리칠 수도 없는 소연이는 피를 터뜨린다. 종우가 아니라 스스로를 쥐어짠다. 종우 잘못이 아니라고. 잘못한 사람은 없다고. 그 노력이 기가 막혔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하냐고.

 그런데 이제는 소연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싶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사랑으로. 뒤늦게 병실에서 소연이를 떠올리는 종우보다 한발 일찍. 슬픔에 익숙해 보이는 소연이도 실은 언제나 슬픔이 무서웠을 것이다. 소연이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다. 그것이 소연이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https://youtu.be/CiuO7bkM6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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