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둥대는금붕어 Oct 14. 2021

해피 엔드

만추, 2011, 김태용 作

살인자와 제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살인자는 상처가 많고 제비는 여자가 많아요. 여자는 무겁고 남자는 가볍고요. 그리고 둘 다 좀 사는 게 불행해 보여요.


원하는 게 딱히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는 삶에 대한 기대가 없고 여자의 남편들에게 쫓겨다니는 남자는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구멍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그 허전함을 나누는 이야기인데요. 옆에서 평생을 붙어 산 가족도, 감옥에 갈 결심을 하고 사랑한 남자도 모르는 내 마음을 어디서 놀고 먹은 제비가 알아주고 위로해준다는 것이 이 사랑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당위성입니다.


훈, 애나에게 시계를 주며

-Wait here. Just half an hour.
-No.
-I'll be back very fast.
-No, I won't be here.
-I know.
-What do you know?
-I know that you won’t be here.


훈이 자기 시계 되게 소중한 거라고 말하잖아요. 저는 그거 거짓말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애나한테 그걸 줘요. 금방 올 테니까 가지고 있으라고. 애나가 자긴 이곳에 없을 거라고 말하니까 훈이 하는 대답이 일품입니다. 나도 당신이 여기 없을 걸 안다고. 저는 그 대사가 좀 외로웠어요. 애나의 마음을 이해하니까 물러나는 거잖아요. 자신의 마음을 뒤로 하고요. 자신감 넘치고 멋대로인 것 같아도 그렇게 애나를 배려하는 모습이 따뜻하면서도 서글펐습니다. 훈 나름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해요.



-Don't mess with Anna. She'd had a hard life. Don't play games.
-Why not play games? They make her laugh. Do you make her laugh?
-You obviously don't know anything about her.
-I don't know. Why do I have to know? But see... I'm with Anna.


왕징을 대신해서 감옥까지 들어갔지만 애나는 그 남자에게 배반당하죠. 그런데 별로 미워하지도 않는 거 같아요. 계속 죽어있던 눈이 그 남자를 보자마자 떨리는데 마음 안 좋더라고요. 아직 사랑하는 거 같기도 하고... 화도 안 내는 게 답답했어요. 그런데 사랑했으면 그럴 수도 있겠어요. 제가 애나가 아니니까 그 복잡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죠. 그래도 그 남자를 사랑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애나는 생기를 되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애나가 훈과 얘기하며 웃는 걸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벗어날 수가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어떤 이유로 출소 후 만나자는 허망한 약속만 남기고 헤어져요. 실제로 출소 후 애나는 카페에서 한참동안 훈을 기다려요. 훈이 오는지 안 오는지는 영화에 안 나와요. 저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면 영화가 웃기게 끝나잖아요.


해피 엔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저는 꼭 남녀가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포옹하거나 키스하며 따뜻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배경삼아 줌아웃되는 장면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이 좋아요. 다만 키스나 포옹이 없어서는 아니고 애나가 웃으면서 끝나는 게 좋네요.


애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이었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한 기억, 오래 떨어져 지냈던 가족에 대한 냉소, 7년이라는 시간동안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괴리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똑같이 냉담하게 대했던 훈을 보며 웃고 그를 기다리는 애나의 행동은 단순히 훈을 기다리는 걸 떠나서 앞으로의 생활에서도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은 걸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훈이 오든 오지 않든 애나는 죽지 않고 살 거라고요. 누구에게도 마음 열지 않으려 한 애나지만, 이제 애나는 다른 사람과도 사랑할 수 있겠죠. 그럴 수 있다는 걸 훈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보면 이 영화는 완벽한 해피 엔드입니다. 다만 그 이면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쓸쓸함이 공존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더 크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훈이 애나에게 슬픔보다는 기쁨의 존재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나의 삶은 이제 다시 시작이니까요.

 


-Hey, It's been a long time...

나이 든 애나의 얼굴이 왠지 밝아져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과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