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너무'와 가장 밝음의 때를 상징하는 '한낮'이 만나 이별 이야기가 되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달콤한 사랑 이야기인가 해서 책을 펼친 사람에게는 의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용과 양희가 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평범한 제목이 거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 둘은 무언가를 했다. 많은 것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양희가 사랑을 고백했고, 양희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필용은 그 순간부터 애정의 개가 된다. 매일같이 사랑을 확인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양희의 얼굴을 살피고.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는 '속물 근성'이 깨어난 것이다. 불안정했던 그 시절의 필용에게 양희의 고백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주었다. 그게 전부이다. 양희는 필용의 일상이 되지 못한다. 사랑을 대하는 양희의 태도는 지나치게 검소해서 필용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흔든다. 그러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사랑하던 이에 대한 환멸이나 후회가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맞는데, 그게 전부임을 뜻한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this is not a love song, Nouvelle Vague>
그래서 필용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양희에게 폭언을 퍼붓다가도 문산으로 내려가면서 양희를 사랑한다고 읊조린다. 그러나 양희의 가난을 몸소 느꼈을 때에는 필용 역시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마음을 느낀다. 그런 필용의 마음을 감지한 양희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담백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부끄러울 것 없는 나무나 보자고 한다. 양희는 예전부터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줄 알았으니까.
시간이 지나 관객 한 명 없는 양희의 연극을 본 필용은 벗겨진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연인의 눈가에 난 점이 보이는 아주 밝은 한낮처럼. 그것은 자의가 아닌 시간에 의한 것이어서 필용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변할 수 있었겠냐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본다. 그것에 대한 답변 역시 시간의 몫이었다. 필용을 한참 바라보다가도 결국 느티나무처럼 두 팔을 벌리던 양희의 인사. 믿고 싶지 않은 결말을 부정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필용은 '너무'라는 단어를 고른 게 아닐까. 양희의 시선으로 이 글을 끌고 갔다면 '아주 단밤의 연애'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양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종종 사랑과 슬픔을 보니까. 대부분의 우리는 양희보다는 필용을 닮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제목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속이 뻔히 보이는 우리들이 저마다의 한낮에 서 있는 이야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