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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y 20. 2022

20대의 나는 무엇을 했었나

드라마 <다모>에 대한 단상들



오늘 역시 <다모>를 보았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번 주도 내내 맬로 분위기라서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사랑이 비극적일수록 아름답거나 우러러 보이긴 하지만 그런 사랑을 하는 당사자들의 찟기는 가슴을 경험해본 사람은 복장이 뒤집어 지는 노릇. 물론 그런 극적인 사랑을 문학이나 영화 창작자는 좋아한다. 허나 그 열정으로 인한 상처들이 가져다 주는 파국은 결코 현실에서 권장하지 못할 일. 예술에서는 그런 사랑을 끊임없이 획책(?)하지만 어디까지나 한시간 두시간 감상용 일 뿐 그것이 현실에서 스물네시간 아니 몇 달, 몇 년 이 지속된다면 결코 장수를 보장받 못할 것이다. 나는 최소한 평균수명을 보장받으며 살고 싶다.




지난 3월달에 홍기선 감독과 만난 적이 있었다. 80년대 서울대 얄랴성으로 영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양반.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와는 전혀 딴 길을 걷던 그 양반. 이름도 섬짓한 <가슴에 돋는 슬픔 칼로 자르고> 라는 영화로 90년대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성취를 이뤄냈던 양반. 장산곶매를 통해 만들었던 <닫힌 교문을 열며> 라던가 <파업전야>를 기억하는 지금 새대들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내 어릴적 기억으로는 최루탄 맞아가면서 봐야 했던 영화들이었다. 그 감독이 <선택>이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기필코 상업영화방식으로 개봉하겠다는 감독의 고집 때문에 혹은 극장주들의 기피 때문에 여짓 개봉되지 않은 영화. 그 영화는 북송된 장기수 할아버지에 대한 영화였다. 보는 내내 가슴이 묵중했었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로그래머가 적극 추천하더군. 반가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오늘 다모의 하이라이트는 원해 부장의 고백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화적패에 죽어서 녹봉 몇 말 받는 초라한 미관말직이라도 무관의 길을 선택했다는 이 부장. 화적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그를 그 자리에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화적패는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패륜 집단 일 뿐 아무것도 아닐 테지. 다만 왜 힘없는 양민이 화적패가 되고 마는 현실에 대해서 이 부장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부장은 매우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선택>의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40여년간 감옥에서 삶을 보낸 김선명 할아버지의 삶을 다룬 영화. 내내 교도소만 나오는 이 영화는 극적인 드라마라던가 반전은 약했지만 드라마 자체의 힘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분단된 현대사의 비극까지 점철되어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굴절된 현대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에서 김선명을 괴롭혔던 교도소 보안과장. 그가 한직으로 밀려나 머리가 히끗해진 김선명을 청송교도소에서 다시 만난다. 이미 지나간 세월은 사람을 약하게 하는 법. 보안과장은 김선명에게 지난 세월의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잊자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지주였다는 이유만으로 공산당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털어놓는다. 자기의 절뚝거리는 다리도 공산당들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고. 이 말을 묵묵히 듣던 김선명씨. 보안과장을 연민의 눈길로 보면서 말을 잇는다. 자신의 가족 역시 단지 빨갱이 아들을 두었다고 경찰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었다고.



오늘 옥이는 결국 성백이에게 사랑을 고백해버린다. 이 어찌 참담한 기분이던지. 결국 이 두 남매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더니 이제는 남녀의 눈빛까지 교환한다. 하지만 둘을 탓할 수는 없겠지. 성백이 왈. 자신 역시 그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진자에게 못 가진 자들을 위해 그들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무어 죄가 되냐고 옥이에게 내쳐 묻지.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조선왕조의 신분차별이나 양반들의 학정이 발 딛지 못하는 사회임을 옥이에게 말한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냐고?


옥이는 성백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 역시 그러고 싶지만 유교의 시스템 속에서 자란 그녀이기에 차마 그것에 마음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성백이에게 마음을 준다. 다만 그가 남성적인 매력이 있었기에? 아닐 것이다. 그가 믿는 신념이 그가 행하는 행동이 정의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세계관의 부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그녀의 고뇌가 나는 더 안쓰러웠다.


또한 오늘은 옥이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황보윤 역시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한다. 능력은 뛰어나나 서얼 출신으로 신분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양반은 어느 정도 그러한 가능성이 엿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종묘사직과 임금에 대한 충으로 무장이 되었던 인물. 허나. 오늘 이 양반은 유교의 기초를 배반하고 만다. 다 필요 없으니 내가 천민이 되도 좋으니 옥이랑 살겠다고 말한다. 사랑에 전생을 걸고 만다. 자고로 유교적 사내는 충과 효에 목숨을 걸어야지 계집에 목숨을 걸면 아니 되는 법. 아예 도망가자고 옥이 앞에서 투정이더군. 드라마적 구성을 위해 어쩔 수 없겠지만. 조선 제일의 무공을 자랑한다는 황보윤 종사관. 그 역시 자신의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세계관을 배반해버린다.


이런 면에서 드라마의 무게 중심은 장성백에게 가 있는지도 모른다. 장두령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 중에 누가 이 대역무도한 역적(?)을 욕할 수 있을까? 멀쩡한 양반도령 역모누명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단지 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힘들게 하는 조선백성들에 대한 연민으로 칼을 잡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고생길에 나선 그 사내.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겨버린 여인네는 자신을 잡으러온 포도청의 다모이자 그의 잃어버린 누이동생. 모든 비극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장성백을 어찌 시청자들이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당시 사관의 눈에 비친 그는 단지 역모를 꾸미는 대역무도의 죄인. 잡혀서 능지처참을 당할 죄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옥이와 윤이가 유교적 세계관을 부정하게 된 것이 바로 장성백 덕분이라는 점. 즉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며 변모하는 인물은 조선사회 시스템의 교육을 충실히 받은 옥이와 윤이라는 사실은 다모가 단순히 무협드라마 라고 치부되기만은 아까운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즉 다모에는 다분히 민중혁명의 개념이 농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장성백이 하는 행동이 정의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사서에는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이 민간설화에서는 정의로운 인물로 전승되는 예는 적지 않으니까. 장성백은 결국 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양반 단순히 의적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뒤엎을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이 과정에 이르는 체제전복적인 사고를 시청자들이 그닥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야 예전 에스비에스 드라마 임꺽정에서도 그랬다 할 수 있고 소설 장길산에서도 그럴 수 있겠지만. 다모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던 옥이와 윤이가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그전의 사극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구성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다모를 통해 말하고 싶은 작가와 피디의 생각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



가입한 카페 중에 청년0000이라는 곳이 있었다. 스스로 우파라 칭하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지 궁금하여 가끔 눈팅을 하던 곳. 최근에 온건우파 중도우파를 표명하는 가면쓴 좌파들이 들어와서 물을 흐린다고 주인장이 경고를 주던데. 그래서였을까? 며칠 전 우파는 스스로 성찰을 하지 않는 이상 또한 친일파의 잔재를 떨치지 않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는 식의 댓 글을 달았었다.


내 스스로도 좌파에선 보수라고 공격을 받는다고. 난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애초에 김정일도 싫고 김일성 체제는 기독교원리주의의 변종이라는 말과 함께. 오늘 보니 그 까페에서 강퇴 되어 있더군. 하도 궁금하여 다른 아디로 들어가봤더니 내가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나. 게다가 내 댓 글 몇 개가 아무런 말없이 삭제되어 있었다. 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보수우파라 칭하는 그들 스스로 적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카페에서 나를 강퇴 시킨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회원들이 보기엔 <다모>는 일종의 빨갱이 드라마 일 수 있다. 아니 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만큼의 식견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시스템을 무력으로서 전복하고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장성백 일당에게 심리적 동요와 더불어 인간적 연민을 느끼고 있는 시청자들은 좌파들의 선동전술에 말려 들어가고 있는 시민들인 것이다. 게다가 다모폐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이삼십대에 넘쳐난다고 하니 그들은 이 사태를 눈뜨고만 바라볼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카페에선 이러한 심각한 사태에 대한 전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체질적으로 보수인 내가 이렇게 라도 두서 없이 적어주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체질적 보수라 칭하는 까닭은. 요순 시대 같은 성군의 출현으로 나라가 평화로울 수 있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있거니와 공산주의는 결국 서구 부르조아지들의 윤리적 파탄과 도덕적 해이로부터 기인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좌파의 출현은 기존 기득권 세력이 그 권력을 행함에 있어 상식적이지 못하고 비합리적이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몸이 건강하지 못할 때 병이 생겨 몸의 건강을 경고하듯이.



장성백도 왕께서 치세의 덕을 이루셨다면 감히 역적질을 생각하지 않으셨겠지. 그런데 왜 스스로 우파라 칭하는 이들은 이런 단순한 진리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양반들의 학정으로 화적질을 하게 된 장성백 일당이나, 그런 화적들에게 무고한 죽음을 당한 이 부장의 아버지 할아버지나 모두 평범하게 살수 있었던 양민들이라는 사실. 영화 선택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고 40여 년 간 감옥에 갇혔던 김선명 할아버지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들을 더욱 거칠고 비인간적으로 다루었던 보안과장이나 모두 역사의 희생자들임을 이제는 다 같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우파라 칭하는 이들은 좌익혁명에 물든 빨갱이의 생각이라고 몰아붙이기만 한다면. 역사는 계속 진보하지 못하고 그 비극을 되풀이하겠지, 물론 그 비극에 마음 아프기 보다 그 비극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딘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겠지만.


사족 : 다모를 보고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고 보니 조낭자 마저도 반유교적인 인물이었다. 어찌 자식이 아비 앞에서 죽겠다고 (물론 말리는 거였긴 하지만) 칼을 들 이잡고 어디 결혼도 아니한 양반집 규수가 외갓 남정네에게 자신의 연정을 대놓고 말한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옥이 보단 조낭자가 더 비극적 인물인거 같다. 옥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두 남정네의 사랑을 모두 다 받지만. 낭자는 그 마음 알아주는 이 없으니. 그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에 나는 왜 더 마음이 가는 것일까?



-2003년 9월에 쓴 글. 

-그 시절 썼던 글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20대의 나와 40대의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또 같을까

-가급적 그때 쓴 원글을 올릴 예정

-각종 커뮤니티에 남겨 놓았던 글들. 이불킥 할 게 숱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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