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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Sep 27. 2020

다시는 안 해먹어

삶은 왜 돌이킬 수 없는지, 없어야만 하는지

워낙 손도 굼뜨고 머리 회전도 느린 편이어서 게임에는 재능이 없다. 롤이고 오버워치고 다 글러먹었다. 게다가 애당초 게임 자체를 자주 하는 편조차 아니기 때문에 잘 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만한 것도 딱히 없었어서, 그냥 완벽한 똥손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글러먹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꼴에 좋아는 하니까 어쩌다 한 번씩 하긴 해야 하고,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강해서 난이도는 중간에서 더 낮추기를 싫어한다. 공략을 찾아봤자 손이 느려서 따라가지도 못한다. 그러면 대체 게임을 어떻게 클리어하나. 조금 흔하고 무식한 방법을 쓴다. 저장과 불러오기다. 천재가 아닌 이상 안 그런 사람 있겠냐마는 나는 좀 더 많이 한다. 조금 가다가 죽고, 그 곳에서 어떻게 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루트로 향한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다시 죽고, 다시 길을 찾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클리어할 때까지 반복한다. 마치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톰 크루즈 같다. 그 사람처럼 멋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1.5배정도의 시간을 들이면 어쨌든 스토리는 끝나 있다.


리셋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이를 회피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경향을 일컫는 1990년산 중견 신조어다. 가벼운 어감과 달리 실재하는 범죄와 연결이 되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말이긴 하지만, 2020년을 사는 사람들 치고 저 단어와 완벽히 관계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리셋은 아니라도, 적어도 세이브 앤 로드 정도는 이어져 있을 테니까. 삶에도 저장과 불러오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세이브 포인트를 넉넉히 주지 않는 게임들을 하다 보면 화가 날 때가 많긴 하지만(그런 게임들은 또 돌아버리도록 어렵다. 다크소울은 정말 개떡 같은 게임이다.)삶을 살다 보면 그것마저도 얼마나 후한 특혜였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유독 그렇다.


보살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숱한 실패를 겪었다. 그 때 그 말 하지 말걸, 그 때 말을 할걸. 최선이라고, 혹은 차악이라고 믿었던 수많은 선택들이 한 관계를 자주 파국으로 내몰았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일방적으로 파국으로 밀리고 만 관계들도 있다. 사람을 보면 언제나 이미 일어난 일들을 취소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게임을 하듯, 가지 말아야 할 길들을 가지 않고, 최선의 길들을 밟으며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좋은 관계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까. 파국이 없는 이야기 속에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맘속에 담는다고 밀봉이 되는 건 아니었다.

종종 인간관계에서의 저장과 불러오기를 생각하다가 한 번은 생각이 떠오른 김에 그걸 붙잡고 오래오래 뜯어봤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는데, 그건 의외로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쪽이었다. 이유는 실패 때문이었다. 사실 실패로 인해 떠올린 생각을 실패 때문에 지운다는 건 우습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내기 때 만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만나지 않은 지 꽤 됐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만났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만나지 않고, 그나마 만나던 사람들 몇몇도 시간이 지나며 다른 사람들과 매한가지가 되었다. 이들을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 어떤 중대한 판단 실수 때문은 아니다. 원인은 대체로 상호의 선택이었고 대부분은 차악도 아닌 최선의 것들이었다. 많은 선택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다시 말해, 대부분의 관계는 애초에 파국으로 이어진다.


물론 다시 돌아가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를 말했을 관계들 역시 존재한다. 어쩌면 꽤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흩어진 많은 관계들은 말한다. 최선의 선택들은 높은 확률로 어떤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들은 완벽한 차이로 인해 갈라서고 완벽하게 같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질려 갈라선다. 그 중간 어딘가의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겪으며 갈라선다. 남는 것은 아주 적은 쌍의 사람들. 어쩌면 그조차도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장과 불러오기를 반복하다 보면, 대부분의 관계는 높은 확률로 나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저장과 불러오기를 반복하며 내린 최선의 결정들이 서로를 낭떠러지로 내몰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수많은 끝을 본 내가, 과연 더 이상 사람을 믿고 관계를 믿고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무한으로 발산하는 나쁜 결말의 가능성들 속에서 몇 없는 그럭저럭의 결말을 찾아내고자 할 정도로 나는 강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믿지 못한 채 모든 관계들을 경험하고 최선의 파국을 예감하며 두문불출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아마 희미해지거나 갈라설 것이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정해진 결말을 바꾸지 못하는 서브플롯에 불과할 것이므로. 나는 모두 보고 왔으므로.


그러나 그 끝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는다. 나는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모든 순간들에 신중을 기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낀다. 다시 불러올 수 없는 한 번 뿐인 기회일 것이기에 사랑을 예찬하고, 다른 선택지의 끝을 모르기에 후회하며 누군가의 소중함을 충만하게 느낀다. 속아보는 셈 치는 것이다. 속지 않을 방도가 없다.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고,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


게임의 난이도를 낮추지 않는 데에는 자존심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은 재미의 문제가 더 크다. 최근에 플레이한 게임에서 너무 넘어가기 힘든 구간이 있어서 난이도를 최하로 낮추고 플레이를 했던 적이 있다. 적이 아무리 총알을 쏟아도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며 게임을 끝장을 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 난이도를 낮춰놓은 걸 까먹고 한참을 더 플레이를 했는데, 게임이 너무 맥없이 끝나버려서 당황했다가 내가 난이도를 최하로 낮췄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이미 나는 이 상황의 맥빠지는 끝을 보았고, 결론을 아는 상태에서의 고심은 아무런 의미조차 없어 보였다. 아, 차라리 총알도 아닌 주먹 한 방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편이 나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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