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대단한 음악 애호가 행세를 하지만 사실 딱히 그렇지는 않다. 일 년 열두 달 음악을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두 달 중 한두 달 정도는 음악을 소음이라 느낀다. 사오 개월 정도는 그냥 별 감흥이 없다. 가끔은 아예 음악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멀티태스킹을 유독 못하는 편이라서 그런 때가 온다. 집중이 쉽게 흩어지는 편이다. 감각적 자극, 그 중에서도 소리에 가장 약하다. 그래서 집중이 필요할 때는 음악을 절대로 틀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는 내가 음악만 틀면 너무 집중을 못 하니까, 혹시 내가 가사를 따라가느라 집중을 못 하는가 싶어서 외국 노래를 틀어본 적이 있다. 소리가 중요하지 텍스트의 국적은 별 상관 없다는 결론이 났다. 자극에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예민하고 신경질적일 때가 많다는 뜻이다. 가끔은 좋아하는 노래도 정신사나워서 도저히 못 듣는 때도 온다.
생각해 보면 음악에 감동받는 순간이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음악의 힘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라, 마치 아무리 멋진 글이라고 해도 가끔 도저히 안 읽힐 때가 있는 것처럼. 음악이 그냥 그럴 때가 있다. 일년 중 사오 개월 정도 그러니까 꽤 자주 그런 셈이다. 그냥 배경음처럼 무던하게 흘러간다고 해야 할까. 극적인 곡조를 가진 무덤덤한 소리라고 하면 적절할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마치 내가 음악을 좋아하기보단 싫어하는 쪽 같다. 하지만 나는 자주 음악에 접신해 사는 사람 행세를 하고, 실제로 자주 그런 상태가 된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라는 곡을 좋아한다. 가사에는 ‘이제는 늦은 밤 방 한 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라는 구절이 있다. 이 부분 즈음에서 이따금씩 가사를 따라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춘다. 정말로 밤에, 방에서. 그렇게 엄청난 비트가 깔리는 곡도 아니고 뚱땅거리는 느낌의 서글픈 곡조를 가진 곡인데도 그냥 그렇게 된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당장이라도 작두 위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때가 있다. 밤 시간에 좀 자주 그렇다. 어떤 날에는 자기 전에 딱 한 곡만 듣고 싶어서 헤드폰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간절히 생각나는 곡을 플레이리스트에서 골라 재생한다. 그런 날이면 보통 노래가 끝내주게 좋게 들린다. 그치, 내가 이러려고 음악 듣는 데 이런 유난을 떨었지. 사 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랜덤재생 플레이리스트는 천연덕스럽게 다른 곡을 재생한다. 어, 한 곡만 들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 곡은 중간에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너무 좋은 곡이고. 그래서 다 들을 수밖에 없다. 너무 행복하게 또 4분을 보내다가, 아, 다음에 나오는 곡도 너무 멋진 곡인데. 어쩔 수가 없네. 애초에 내가 좋아해서 플레이리스트에 담은 곡들인데 이런 날 그것들을 쉽게 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타이밍에 듣는 곡들은 그 곡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 목소리가 현악기처럼 느껴진다든가, 넋이 나간 듯 머리를 흔들게 한다든가, 뭐 그런 것들. 그 모습들에 휩쓸리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새벽 두 시 세 시가 되어 있고,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하고 나는 허겁지겁 침대로 뛰어든다.
이런 것들을 사 모으다 보면 가끔씩 네 귀는 두 개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아서 좋다.
어떤 때는 노이즈에 불과한 것이 어떤 때는 기꺼이 밤을 지새우게 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종종 무엇이 그런 접신의 순간을 만드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밤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기엔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았던 밤이 너무 많다.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보기엔 고요를 원했던 나른함이 살면서 너무 자주 있었다. 새벽감성이라는 말로 쉽게 정의되곤 하지만 이 순간은 생각보다 다양한 시간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아침 출근길이나, 그냥 오후나, 애매한 저녁이나, 심지어 가끔은 급한 일을 할 때도. 어떤 조건들이 어떻게 배합되어 내가 머리를 흔들게 되는지 알고 싶다. 그런 날에는 음악만 듣기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 말고 뭘 좋아하냐면, 대화를 좋아한다. 어떤 형태라도 좋다. 마주보고 하는 것이나, 문자로 하는 것이나, 편지로 하는 것이나, 뭐 그런 어떤 형태이든. 사실 통화는 아직 적응이 좀 필요하지만. 다만 종종 이야기마저 소음이 되는 때가 있다. 사실 꽤 자주 그렇다. 음악과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담고 싶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알리고, 또 바꿀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자주 지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말들은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고, 내 문장, 내 발화는 맥없이 흩어진다. 이런 순간들 속에서는 그 누구도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 수 없다. 기대했던 가수의 새 앨범이 생각보다 별로였을 때처럼, 모처럼 만난 사람들은 머쓱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퀭한 눈으로 나눈 대화를 예의상 곱씹는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몇 시간의 대화도 지치지 않는 때가 온다. 말이든 글이든 상관없이 그렇다. 밤을 새워 대화를 하거나 글을 읽을 때, 그러다 서로가 완벽히 합쳐졌다는 생각이 들 때. 음악에 접신하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 역시 불현듯 찾아온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라 부르면 좋을까? 내 시간들의 어떤 성분들이 배합되어야 이런 날이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다. 내가 기꺼이 듣고, 기꺼이 말하고, 기꺼이 앞으로 나설 수 있는 순간들. 내가 온전히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만난 것들 중에서 분명 멋지고 아름답고 눈물겨운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을 것이다. 그들을 완전히 다시 만나 헤드뱅잉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