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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Apr 11. 2021

불신의 역사

20년 교회 연대기

아버지는 일곱 남매 중 여섯째였고, 그 일곱 명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집안 어르신들의 기일마다 첫째 큰아버지 댁에 모여 유교식의 상을 차려 놓고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구절을 읽은 뒤 기도를 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전도사를 꿈꾸던 분이었다. 내가 어릴 때 기독교식 유아세례를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태신앙이 형성되는 가장 모범적인 조건을 타고난 셈이다. 어릴적 동요 삼아 부르던 노래들의 많은 수가 찬송가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였다. 한편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는 분이셨기에, 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두 분께서는 따로 종교를 두지 않고 사는 분이셨고, 한국의 여느 집안처럼 유교적 전통을 따라 사는 분이셨다. 집안 어른들의 기일이면 향을 피워 놓고 제사를 지내셨다. 설날에 친가쪽 큰집에 가면 기독교적 제사를 지냈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외할아버지께서 향을 피워놓고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계셨다. 이것이 내 어릴적의 삶의 모습이었다. 주일 어린이 성경학교의 공간과 집안에서의 공간은 좀처럼 섞이지 않았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애매하게 걸친 채로 자랐다.


종교적 조경수역에서 자랐어서인지 기독교 모태신앙을 가진 아이들이 보통 얌전하고 적당한 신앙심을 가지고 자라는 것과 다르게, 어릴 적 나는 종교에 그다지 효능감을 느끼지 못했다. 기독교는 신앙보다는 한 사회 질서로서 내 삶에 작용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의 일이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는 어린이 달란트 시장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전도사님께선 당분간의 예배 태도에 따라 달란트를 지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열성적인 어린이 신도를 연기하기 시작했는데, 그 연극의 내용이란 예배 시간마다 두 손을 모으고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찬송가 역시 열심히 불렀다. 물론 거기에는 신앙심 같은 것은 없었고, 이렇게 하면 전도사님이 좋아하겠거니 하는 것 정도가 머릿속에 든 생각의 전부였다. 전도사님은 나를 ‘예배에 특별히 잘 참여하는 어린이’로 뽑아 특별히 많은 달란트를 주셨다. 그런 식이었다.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했다기보단, 일요일에는 그곳에 가야 하고, 그 곳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더라 정도가 내 어린시절 종교에 대한 가치판단의 전부였다. 다시 말해, 내게 기독교는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면서 나는 옛 시절의 예의범절을 자연스레 익혔다. 어른을 공경하고, 말을 공손히 하고, 입신양명을 하고. 그곳에서 배운 질서는 교회에서도 통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얌전히 기도를 드렸다는 말씀을 드리면 기독교에 전혀 관심 없는 할머니 역시 좋아하셨다. 


어쩌면 이때부터 불신의 싹을 키우기 시작했던 듯하다. 적어도 부모님은 내가 착한 하나님 어린이라고 생각하고 계셨고, 나는 하나님이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말을 좀 잘 들어야겠거니 한 것이 전부였다. 다만 그건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라는 그 사람 말을 잘 듣는 게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불신은 시작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사를 가면서 다닐 교회가 없어졌는데, 전학간 곳에서 처음 사귄 친구가 마침 아주 신실한 기독교 집안의 아이였다. 아버지는 장로요 어머니는 권사셨던 그 친구는 나와는 다르게 신실한 신앙심을 물려받아 자랐다. 그 아이는 내가 다닐 교회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반색을 하며 자기 교회 청소년부로 나를 데려갔다. 당시 내게 딱히 종교적 열의는 없었으나 친한 친구를 학교 밖에서 매주 보는 것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얌전히 거기에 따랐다. 새로 간 교회는 그냥저냥 무난한 곳이었다. 그냥저냥 착한 찬양을 하고 설교를 했다. 말은 제법 들을 만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쯤 새로운 전도사가 왔다. 일종의 터닝 포인트였다. 이전의 전도사는 마냥 살가운 사람이어서 설교 시간에 착한 말들을 주로 했는데, 새로 온 젊은 전도사는 우리를 호되게 혼냈다. 사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의 질책은 어느 정도 들을 만하다면 얌전히 넘어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의 질책은 그런 수준이 못 된다는 것에 있었다. 그는 우리가, 찬송가보다 가요를 더 듣고, 성경책보다 세상 책을 더 읽는다며 매 시간 소리를 지르며 질책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그런 걸로 나를 혼내진 않았고, 나는 그 질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찬송가를 따라부르고 얌전히 기도를 드리는 것, 가만히 설교를 듣는 것, 어른을 공경하는 것,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말을 공손히 하는 것, 그런 것들 중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질책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생각했다. 이건 내가 마땅히 따라야 할 무언가가 맞나? 신앙심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질서였다.


마침 그 시기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 그 친구는 굳이 분류하자면 극성 불신자였는데 학교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아이가 있으면 굳이 찾아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라며 윽박을 지르는 류였다. 그 아이는 어느날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유사 성경을 들고와 진지하게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재림예수가 냉면인지 라면인지를 먹다 목에 걸려 죽었다는 그 종교였는데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그게 기독교 계열의 사이비 종교인 것은 알았다. 그 친구는 나에게 최선을 다해 전도를 했다. 친한 친구가 천국에 가기를 바란 마음이었겠지만 받고 싶진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한편, 성경책을 세상 책보다 더 많이 읽어야 한다는 그 질책이 저 친구의 어머니 하나님 강변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기도 했다. 신앙이 없이는 따를 가치 없는 헛소리라는 점에 있어서 둘은 동일했다.


의문을 품으며, 친구를 보러 교회에 계속 나가던 중,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 시기 우리 목사님께서는 내게 제대로 마지막 일격을 날리셨다. 그 분은 설교 도중 인도에 선교를 떠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나는 당연히 그곳의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의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배운 기독교란 ‘올바른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인도에서 종교적 고행을 하는 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들의 저 미개한 모습을 보라고, 기독교가 아닌 잘못된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저렇게 된 거라 소리쳤다. 그러면서 올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는 그 이후로 기독교를 규범으로조차 인식하지 않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므로 교회와의 연을 마음먹은 즉시 끊을 수는 없었다. 이 인연은 상당히 오래 이어졌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강해진 축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와 마땅히 지낼 곳이 없었던 나는 어느 교회의 학사관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수많은 부당함을 목격해야 했다. 스물이 된 나는 머리가 조금 굵어져 내 기준의 옳고 그름을 넘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회적 이슈나 사회적 정의가 내 판단 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후진적이었다. 그들은 내가 정의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악’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았고, 본질적인 부분에 질문이 닿으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결국 전도사와 크게 싸우고 교회를 떠났다. 전도사는 내게 크게 배신당한 듯한 반응이었는데 내가 어릴 적 내면화한 그대로 공손히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찬양을 불러온 신자였기 때문이다. 성가대의 테너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 싸움 뒤에 신도들은 내가 베푼 은혜의 출처를 점검해야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내게 기독교가 차별과 폭력의 종교라는 인상을 남겼다. 교회 커뮤니티를 완전히 떠난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본 교회는 나의 마지막 인상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의 종교가 아니며, 여전히 따를 가치 없는 질서를 숭상하고, 그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호통을 친다. 


수능 전날,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친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었다. 혹시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나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럴 생각이 없고 내일은 수능을 봐야 하니 나중에 보자고 정중하게 전화를 끊었다. 스무살 여름, 중학교 때 좋지 않게 헤어진 한 친구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그 아이는 목사님의 아들이었는데 며칠 같이 어울리는 척을 하더니 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 두명이 한 명은 고객, 한 명은 사업주라는 사실 외의 유의미한 차이점을 떠올리지 못했다.


스물 여섯 해를 사는 중 스무 해를 교회와 함께 지냈으므로 내 삶의 큰 부분에 종교가 함께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행은 삶의 양식으로 시작해 불신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그라데이션을 명명하자면 불신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외할머니에게 배운 가치들을 삶의 신조로 여기며 살아간다. 두 종교의 경계에서 자라오며 어떤 종교는 규범이 되었고 어떤 종교는 멸시로 남았다. 그 최종 판결은 내 삶의 사소한 가치판단들의 연속에서 왔다. 나는 유교적 규범들이 따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내면화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규범에 벽을 느끼고, 이를 실천해야 할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이를 거부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연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신의 역사는 종결되었고 나는 지금 나를 믿으며 살아간다.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나를 오만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내가 보기에 오만한 것은 그들이다. 과연 누가 정말로 오만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그에게 판단을 맡긴다. 하나님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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