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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Dec 18. 2021

유창한 말들의 습격

텅 비어 알 수가 없네


편지쓰기가 취미였던 때가 있다. 스물한 살에서 스물 세 살 될 때쯤의 일이다. 그 나이 근처에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것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카투사 복무를 해서 매일 오후마다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 때 나와 함께 군복무를 하던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러는 걸 보며 그냥 차라리 카톡을 하든 이메일을 보내든 하라고, 뭐하러 그렇게 우체국을 들락거리냐며 핀잔을 주는 축이었다. 하지만 나는 코웃음만 치고 계속 편지쓰기를 이어나갔다. 카카오톡으로 보낼 수 있는, 혹은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는 말의 질량은 편지로 말할 수 있는 말의 질량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슬로우 라이프나 아날로그 감성의 일환일까도 생각해 보았다. 느린 이야기의 낭만을 느끼기에 내 성격은 필요 이상으로 급했다. 나는 매번 빠른우편을 보냈다. 아무튼 그 질량을 가득 담아, 나는 꽤 긴 글속에 모종의 마음들을 담아 편지를 줄줄 써내려갔고 그걸 받은 친구들은 그 종이를 차력쇼 보듯 했다. 답장을 받는 일은 많지 않았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편지에 대한 감상은 카카오톡으로도 충분했다.


앞 이야기와는 조금 안 어울리지만, 잊기에는 좀 빈번할 만큼 정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하는 사람도 꽤 두루두루다. 사람을 T-F로 나누는 MBTI 유행의 영향인가 싶다가도 몇 년 전에 비슷한 말을 종종 들었던 걸 생각하면 아주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이건 약간은 억울한 일이다. 내게 정이란 항상 너무 자주 넘쳐버려서 오히려 애써 막아야 하는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세상 오만 것들에 사랑하는 어쩌구와 좋아하는 저쩌구 같은 수식어를 붙여 대는 통에 나는 짤막한 사회경험 중에 난잡하게 붙은 하트 라벨들을 떼어내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여러 번 해봤던 항변인데 믿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이 항변에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전에 네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나는 그에게 오래도록 최선을 다한 애정 표현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 외에도 여러 사례들이 있다. 가장 아끼던 학생들이 나에게서 너무 큰 거리감을 느낀다는 말을 하거나 (나는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해서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별안간 답답해하며 사라지는 사람들이 생기거나. 편지를 쓰지 않게 된 것의 영향일까 하고 잠시 생각을 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로는 도저히 전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던데 나는 그게 어렵다. 생각해 보면 감정을 두껍게 담고 있는 말을 할 때 나는 언제나 텍스트의 힘을 빌렸다. 그렇다고 한두 번 만난 사람들에게 전부 손편지를 한 장씩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스무 살 언저리, 그러니까 손편지를 쓰기 전에는 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 정도의 부피는 되어야 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장문의 카카오톡이 느끼하다는 사실을 꺠달았다. 그 뒤부터는 손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방금 한 말마따나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손편지를 돌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두껍게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차라리 텔레파시를 연습해보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정 하고싶은 말들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말들은 메모장 같은 곳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평소에 쓰는 글들 사이에 조용히 녹여 두었다. 어쩌면 요즘 글을 잘 쓸 수 없는 것은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독심술을 써 주었으면 좋을 텐데. 결국 아무도 그런 기술을 쓰지 못했으니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일 테다. 요즘은 편지도 잘 못 쓴다. 이거 민망해서 원 참.


친구가 내 사주를 읽어 주면서 '사주에 표현을 말하는 글자가 있는데, 그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친구는 그게 실없는 소리들을 뜻한다고 했다. 표현은 나에게 있어 핵심이고, 그만큼 표현이 많지만 그만큼 공허하다나. 내가 쉴새없이 내뱉는 말장난들이 그 명확한 예시라고 했다. 그런 모습을 이런 유형의 대표 사례로 세워 두어도 좋을 정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텅 빈 것이 개그 뿐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확실히 나는 말 자체를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랬다면 미숙함 속에 의미심장함을 숨길 수나 있었을 테다. 문제는 이 유창함에 있었다. 유창한 문장들은 두꺼운 감정들을 능숙하게 손 뒤로 감췄다. 마음 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는 소리다. 스무 살 때인가, 아는 형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는 모든 사람하고 비즈니스인 것 같아. 그 때는 "내가 그래서 혼자인가보다. 장사 수완도 없는데 비즈니스를 해서." 하고 가볍게 넘기고 말았는데,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나마 그 때는 술주정이 사람들에게 카톡을 해서 좋아한다는 말들을 쏟아놓는 것이기나 했는데. 물론 그 때의 술주정이 그립지는 않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요즘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유감과 함께 터뜨리고 있다. 이러다가는 아무도 남지 않게 생겼다. 편지를 다시 써야 하나 하기도 했지만 그 사이 이제는 편지를 보낼 수 없게 된 사람들도 몇몇 생겨버렸다. 아무래도 편지는 너무 느리다. 차라리 내가 뛰는 게 빠를 것이다. 새로 오는 한 해에는 좀 뻔한 사람이 되는 걸 목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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