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4
나는 긴 잠이든 쪽잠이든 잠에서 깰 무렵엔 깜짝 놀라듯 눈이 전구처럼 켜지면서 이부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는 타입은 아니다. 잠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 할까. 정확히 반반에 걸칠 수도, 잠 쪽으로 치우쳐 그대로 밤새 꾸던 꿈을 연장할 수도 혹은 완전히 깨어버리기 직전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날 약속이 정해진 날이면 가수면 상태는 좀 더 자주 반복된다. 약속은 어떤 약속이든 다 마찬가지로 '미리 결정된' 그 어떤 만남과 일정을 말한다. 학생이었을 때는 등교, 직장인이었을 때는 출근 같은 의무적인 약속은 당연하고 내가 좋아서 선택한 취미활동, 학원, 스포츠 센터를 비롯해 하다못해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야 하는 소소한 일정이 있는 날에도 일어나기 싫으니 정해진 만남과 약속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다.
올레길 2코스를 걸은 다음 날 온몸은 물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지고 다리는 붓고 발목이 시큰거렸다. 평소 운동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삼십 킬로를 걸었으니 몸이 정상이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일어난다 해도 바로 쓰러질 상태라 계속해서 잠의 나라에 머무르려 했다. 그런데 꿈인지 상상인지 눈앞이 환해지면서 분명히 뚜렷한 영상 하나가 보이는 게 아닌가.
길이 보인다. 길을 사이에 두고 검은 돌들이 낮은 울타리처럼 쌓여 있는데 그 안엔 싱그러운 초록잎이 한가득하다. 그런 밭이 사방 천지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길가에는 드문드문 작은 나무가 서있고 나뭇가지엔 리본이 묶여 있다. 바람에 리본이 날린다. 바람에 리본이 날, 린, 다.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지런히 씻고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 영상 속의 길은 내가 걸었던 길이 아니다. 그런데 그 길이 그립다. 마음 한 구석이 저릴 만큼 그립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길이 그립다니,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길이 나를 부른다 할까.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길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를 기다리는 길. 어쩌면 그 길은 아주 먼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게 약속한 길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에서 과거의 나를 만나야 한다. 왜 만나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꼭 만나야 한다는 건 안다. 그러니까 길을 떠나자.
화창한 날이다. 2코스의 종점 온평 포구에서 오늘의 길을 시작했다. 두 코스를 걸은 후 고장 난 기계처럼 삐그덕거렸던 몸으로 계속 걸을 수 있을까 우려했는데 삼십 분 정도 걷자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벌써 나에게 걷기 근육이 생긴 걸까.
올레길 3코스는 두 개의 오름과 사진작가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이 있는 조용한 마을 삼달리와 소낭(소나무의 제주어) 숲을 품은 신천리 마을 길을 제외하면 거의 바닷길이다. 갯바위에 서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 묵묵히 낚싯대를 드리운 동네 낚시꾼만 간간이 보일 뿐 역시나 사람 보기 어려운 길을 혼자 걸었다.
3코스 바닷길 초입에는 작은 첨성대처럼 생긴 제주의 옛 등대 도댓불이 세워져 있다. 돌을 쌓은 솜씨가 매우 견고하다. 제주에는 돌이 많다.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검다 못해 시커먼 돌은 바다와 숲에는 물론 제주인의 삶의 양식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집담, 밭담, 산담 등의 울타리나 경계를 구획하는 표시, 도댓불, 불턱, 방사탑 등의 구조물, 수호신 돌하르방과 망자를 위무하는 동자석은 모두 돌로 만들었다. 자연과 옛 길로 길을 낸 올레길을 걷다 보면 돌이 없는 풍경이 없을 정도로 제주는 청명한 하늘 아래 밝고 따뜻한 색채와 구멍 숭숭 뚫린 시커먼 돌로 채워진 섬이다.
지난 두 개의 코스를 걸으며 제주가 돌로 가득한 섬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면 3코스에서는 길가의 꽃들과 저마다 다른 수형과 몸피를 지닌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어느 집 돌담에 부착된 파란 올레 화살표, 정신없이 꼬리를 흔드는 귀여운 강아지, 숲 속 붉은 화산송이와 나무들의 그림자까지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고갯짓을 하고 몸을 흔들며 온몸으로 나의 걷기 여행을 축하하고 응원해주었다. 하늘과 구름, 파도와 돌, 꽃과 나무, 돌담과 전봇대가 배시시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믿지 않겠지만 그것들 모두가 아주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처럼 생겨서 통오름, 혼자 뚝 떨어져서 독자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오름에 올라 하늘길을 걷다 내려와 삼달리 마을을 지나니 마침 넓고 반듯한 평상이 있길래 도시락을 먹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 집에서부터 도시락을 챙겨 나왔다. 올레길에서 식당 찾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나는 원래 야외에서 먹는 도시락에 대한 로망이 있다. 맑고 화창한 날 아름다운 자연 속이나 잘 조성된 말끔한 공원에서 쉬었다 갈만한 좋은 자리를 발견하면 나는 도시락이 떠오른다.
도시락은 여행, 특히 걷기 여행에선 가장 이상적인 식사다. 도시락은 명랑 쾌활하다. 발랄하고 산뜻하다. 야외에서 먹는 도시락이 특별히 맛있는 이유는 오감으로 먹기 때문이다. 따뜻한 햇살과 상쾌한 공기 속에서 기분 좋은 풍경을 보고 상쾌한 소리를 들으며 먹는 밥은 아무리 소박한 음식이라도 꿀맛이다.
올레길을 걷는 동안 나는 이런저런 수많은 길 위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주로 바다를 눈앞에 두고 먹는 일이 많았지만 오름과 숲, 때론 공원이나 어느 마을 작은 놀이터에서도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을 먹은 후엔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적는다. 그렇게 나는 길 위에서 점점 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끄적이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는다.
삼달리 마을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바닷길을 걷다 보면 바다 목장을 만난다. 바다를 마주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초원에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바다 목장이 얼마나 넓은지 말들이 주먹만 하게 보인다. 드넓은 목장에는 키 큰 야자수가 울타리처럼 둘러 있다. 초원과 야자수, 말들이 한가롭게 있는 풍경을 보면 외국에라도 와 있는 듯하다. 제주는 확실히 육지의 모습과 다르다.
바다 목장을 지나자마자 양동이를 들고 가는 동네 낚시꾼을 만났다. 슬쩍 보니 양동이에는 잘 손질된 커다란 광어 한 마리가 죽 뻗어있다. 광어 밑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한가득이다. 낚시꾼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혼자 무슨 재미로 여행을 다니느냐고. 나는 슬쩍 미소 지으며 광어 밑에 작은 물고기들은 뭐냐고 물었다. 멸치란다. 제주는 참 뭐든 스케일이 크다. 손가락만 한 멸치라니. 낚시꾼은 묵직한 양동이를 들고 마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나도 다시 길을 걷는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서 혼자 낚시를 하는 건 무슨 재미일까. 오늘 낚은 광어 한 마리, 멸치 한 양동이가 저 낚시꾼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낚시의 전부가 노동만은 아니란 건 알겠다. 어쩌면 순전히 재미 삼아 낚시를 하는지도 모른다. 물고기를 기다리는 그 많은 시간을 오로지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인내하고 버티진 않을 거란 얘기다. 물고기를 낚는 기쁨보다 낚싯대를 담그고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 그 자체를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혼자 걷기 여행도 낚시와 닮았다. 걷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며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자연과 세상은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를 낚는 기쁨과 같다. 바다 목장과 같은 절경은 대어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낚시를 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저 낚시꾼도 혼자 걷기 여행은 한 적이 없으니 나의 즐거움을 몰라서 물어봤을 거다.
신천리에는 마을 유일의 소낭 숲이 있다. 날이 훤한 대낮에는 금방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숲에 불과하지만 오후 5시 무렵의 숲은 어둑어둑했다. 해 지기 전에 종점에 도착하려고 서둘러 걷는데 낯선 마을의 어둑어둑한 숲을 지나니 좀 무서웠다. 겨우 숲을 빠져나왔는데 어디선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말이 날아왔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전봇대에 기대어 있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아이를 만날 줄이야. 아이는 발로 땅을 툭툭 찬다. 심심해 보이는 얼굴이다. 나는 "으응..."하고 뜨뜻 미지근한 대답을 하고 아이 곁을 지나쳤다.
아이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데 이번에는 다리가 짧은 개가 느물 느물 내 쪽으로 다가온다. 설마 정말로 나에게 오는 건가 했는데 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내가 갈 길을 막고 섰다. 나는 가스총을 꺼내 개에게 겨누며, "저리 가. 안 가면 쏠 거야."라고 위협을 했다. 말귀를 알아들은 걸까. 개는 잠시 더 물끄러미 나를 보다 낙담한 얼굴로 천천히 뒤돌아갔다.
개가 가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런 시골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깨끗하고 세련된 건물이 있다. 푸른 바다를 마주한 하얀 건물 벽에는 숨비 아일랜드라고 쓰여있다.
들러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갈 길이 바쁘다. 순전히 올레 표시만 믿고 여행을 하는데 날이 저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주의 밤은 캄캄하다. 올레길은 더욱 캄캄하다.
표선 해비치 해변만 지나면 3코스의 종점이다. 표선 해비치 해변. 살면서 그토록 긴 해변은 처음 본다. 가로로 긴 것이 아니라 세로로 길다. 마침 밀물 때인지 모래사장이 드러났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바다에 가까이 가려면 모래 위를 한참 걸어야 한다. 올레 3코스 종점에 가려면 해변을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다. 하늘은 점점 노랗게 변해가는데 모래 위에 내 그림자가 아주 길게 바다 쪽을 향해 드리워졌다.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내 그림자다. 처음 보았다. 내가 여기에 있구나.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오늘 나는 온종일 어디를 걸었고 누구를 만났을까. 그 아이와 개...
낯선 이에게 인사성 밝은 아이의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며 착하다고 칭찬을 해주고, 지나가는 여행자의 간식이 궁금한 개에게 다음에 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할 법한데 나는 왜 그토록 어리숙한 모습으로 당황하며 자리를 떠났을까. 저물어가는 해와 서둘러 다다라야 하는 목적지에 급급해 나에게는 그런 마음 씀씀이 따위 아직 없었던 거다.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그건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다. 자기 그림자를 보고 눈물이 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대체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그림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여태 여기까지 잘 와줬구나. 저 모래사장에 깊이 새겨진 물결 자국처럼 내가 살아온 세월도 내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겨 있겠지.
석양에 모래는 점점 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나는 이 아름다운 해변보다 빛나는 인생은 아니지만 나로서 충분하다. 나는 아직 서툴고 어리숙한 사람이지만 여기에 이렇게 발자국을 남기고 그림자를 드리웠다. 다음 길을 걸을 땐 낯선 마을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개에게도 부드러운 눈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길을 걷는 건, 나를 만나는 것이다. 내 그림자와 마주 하는 것이 나와의 첫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