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키울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한지 짧게는 10개월 길게는 5년 정도 된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어린이용 세계문학전집에 들어있었던 것 같은데
그 책을 읽고 나서는 고양이, 특히 검은 고양이를 보면 소름이 끼치며 무서워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 안에서 정작 무서운 존재는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마 벽 속에서 고양이가 나타나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어린 마음에 무서움이 싹텄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집에서 강아지는 몇 마리 키웠었는데 엄마는 고양이는 요물이라며 함부로 들이면 안된다고 키울 생각을 아예 안하셨다. 그래서 고양이는 청소년기의 나에게는 세상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회사 들어와서 음악프로그램 AD를 하면서 이것저것 가요를 챙겨 듣다가, 시인과 촌장의 “고양이”라는 노래를 듣게 됐다.
’그대는 정말 아름답군 고양이,
빛나는 두눈이며 새하얗게 세운 수염도
그대는 정말 보드랍군 고양이,
높은 곳에서 춤춰도 어지럽지 않은
그 아픔없는 눈 슬픔없는 꼬리 너무너무 좋을테지.
캄캄한 밤중에도 넘어지지 않는 그 보드라운 발.....‘
86년쯤 나온 노래일텐데 지금 들어도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요즘 감성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고양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아, 고양이가 무서운 동물이 아니고 아름다운 동물이었어?
한참 뒤에는 소설가 K씨와 1년 정도 일을 같이 했었다.
K씨는 당시 고양이를 2마리 키우고 있다고 했다.
일요일 오전에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고양이들이 침대에 올라와서 머리맡에 보다가 놓아둔 책을 떨어뜨린다고 했다.
마치 ’집사, 이래도 안 일어날 거야? 일어나서 밥 안 줄거야? 안놀아 줄거야?‘라고 말하는 듯이 책을 한 권씩
떨어뜨려서 잠을 깨운다고.
그때 비로소 ’집사‘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혼자 생각했다. 고양이가 그렇게 영리하고 머리를 쓰는 동물이라고? 한꺼번에도 아니고 일어날 때까지 한 권씩 한 권 씩? 그렇게 디테일이 있다고?
그리고 같이 일했던 ’빨강머리 ‘작가,
그녀의 모든 물건에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필통, 가방, 티셔츠, 손수건... 온 사방에서 고양이가 나오는 그녀의 소지품을 보면서 참 신기했었다.
고양이를 키우다 보면 저렇게 사랑하게 되는건가... 고양이가 그려진 물건들을 찾아다니고 그 물건들을 사랑하게 되는건가? 아니 고양이를 12마리나 키우면서 애지중지하는 그녀를 보면서,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저렇게 행복한 일인건가?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가 연희동으로 이사를 왔다.
연희동은 길냥이들의 파라다이스다.
골목골목마다 캣맘들이 사료와 간식을 챙겨놓고 동네 주민들도 길냥이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랄까.
특히 동네 뒷산인 궁동산에 가면 고양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였다.
어느날 남편이랑 산책을 갔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사전 양해의 몸짓도 생략하고 남편 무릎 위로 쓱 올라가서 앉는 게 아닌가.
우리는 너무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얘기도 못하고 서로 눈만 껌벅껌벅 쳐다보고 있었는데 고양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그렇게 앉아있더니 또 몇 분 지나니까 볼일 다 봤다는 듯이 스르륵 무릎에서 내려서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엇, 이런 쿨한 존재 같으니라고.
산책 코스 끝에는 4번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고 거기에 팔각정처럼 생긴 휴게소가 있는데 동네 고양이의 집합소였다. 많을 때는 형형색색의 고양이가 6마리까지 앉아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운 여름에는 마루바닥에 시원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소슬한 가을이면 뭔가 사색에 잠긴 듯 먼 하늘을 쳐다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고양이는 어쩜 세상에서 젤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리고 가끔 우리집 마당에도 고양이가 찾아왔다.
마치 제 집인 양 마당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치면 한참을 쳐다보다가 스윽 등을 돌려서 사라지는 아이도 있었고, 또 나무와 나무 사이 빈 흙 무더기에서 늘어지게 봄볕을 쬐며 해바라기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준 그네들이 너무 반가와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하다가 결국 15킬로그램 짜리 사료를 사서 마당에다 열심히 놓아주기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뒤로는 잘 나타나지가 않았다. (사료가 맛이 없었나, 15킬로그램, 이거 어쩔!)
그리고 쭈니.
작년 봄부터 다니기 시작한 병원의 주치의 쌤이 10년 넘게 키운 고양이가 쭈니인데, 이 친구는 간질병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아주 아기 때부터 쌤이 우유를 먹여가면서 키웠고 지금도 간질 발작이 나지 않게 병원에 계속 다니면서 사료도 특수한 사료를 먹이고 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한 번 알게 됐다. 아, 고양이도 그런 유전적인 질병 때문에 힘들 수 있는 거구나.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아픈 줄 알면서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지불하고서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고양이라는 존재구나.
또한 고양이를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있다.
이 녀석도 길에서 길냥이를 보면 구경하고 사진찍느라 집에를 안들어오는 녀석이라 진즉부터 고양이를 키우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서 못들은 척 외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사실은 최근 1년 가까이 고양이 생각을 많이 했다.
둘째 아이를 가질 때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우선, 고양이를 들이고 싶은 나의 이 마음이 오래 갈 마음인가, 15년 이상 같이 할 식구를 들이는 건데 새끼 고양이 보고 귀엽다고 들였다가 혹시나 그 맘이 바뀌면 어떡하지 자신이 없었고, 내가 그 15년 사이에 고양이를 책임지지 못할 상황이 오게 되면 그 아이는 누가 돌봐줄 것인가도 걱정됐고, 아직 회사를 다닐 시간이 몇 년 남았고, 그 후에도 내가 완전히 집에서 놀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충분히 돌봐주지 못할 거면서 들여왔다가 그 애가 불행해지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도 많았었다.
그래서 맘속으로, 어느날 아침 대문을 열고보니, 거기 아기 고양이가 발견됐으면 좋겠다, 아니면 누군가 못키울 형편이라며 고양이를 무턱대고 맡겨오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들일 수 밖에 없는 그런 ’묘연‘이 찾아오지는 않나 은근히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내가, 오늘 고양이를 들이기로 맘먹고 찜해놓은 3형제 중에 어떤 아기를 데려올 것인지 최종 결정하러 간다.
걱정하던 부분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최근 한 달간 내 맘속을 찬찬히 들여다본 결과, 어느 누구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내가 반려로서의 한 생명을 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애드가 앨런 포우로부터 시작됐던 고양이에 대한두려움이 이제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바뀌어가는 걸 느낀다. 그냥 그 존재를 품에 안아 맘속으로 받아들이면, 그래서 그 애와 같이 눈을 맞추다 보면, 아니, 그 애는 그 애대로 존재하고 나는 나대로 존재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다 보면 어쩐지 걱정하는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 같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