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었더니 네 시간표는 네가 알아서 짜라 한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는 것이 숙제인데, 운이 없으면 나처럼 서너 시간 동안의 공강이 생겨버린다. 텅 빈 서너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매주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요일에 나는 가만히 다음 수업을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던 중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일이 떠올랐다. 앞선 수업을 마치고 공강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단은 교문 밖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27번 버스에 올라타면 그때부터는 버스 기사님의 힘을 빌려야 한다. 활처럼 휘어진 부산의 도로들을 화살처럼 내달릴 줄 아시는 부산 버스 기사님들. 처음 타보는 이라면 전철보다도 빠른 그 속도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학교가 위치해 있는 대연동에서부터 여기까지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남포동 국제시장. 대학생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 동기를 따라 처음 와봤던.
시장 골목이 골목을 토해내는 과정을 밟다 보면 어느새 구제 옷가게들 틈바구니이다. 처음엔 무척이나 낯설었다. 스무 살 이전까지 내가 가봤던 시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고, 싼값이라도 헌 옷을 사고판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기를 따라다니며 배웠던 까닭은 편안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개별의 가격표를 달아놓지 않고 그냥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몇천 원.” 뭉뚱그려서 쓴 글씨란 누구든지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응원 같았다. 열심히 구제 옷 쇼핑을 배운 결과 나는 혼자서도 이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세탁소 옷걸이로 행거에 걸린 옷들도 있지만, 골목을 좁히며 바닥에 쌓여진 옷들도 있다. 그야말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인 그 옷들은 보통 “천 원”이다. 마련된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작정을 하고 뒤지기 시작한 손님들, 그들이 보물을 찾길 바라는 주인장 사이엔 정겨운 대화가 오고간다. 나도 과감하게 바닥 뒤지기를 시도해본다. 공강 세 시간 가운데 두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한 집을 적당히 뒤지다가,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다음 가게로 이동해야 한다.
구제 옷 쇼핑을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고가의 브랜드가 집힐 때가 있다. 백화점이 아니라 여기에서 만난 게 반가우면서도 내심 짝퉁은 아닐까 의심이 들고 그러다가 너무 옛날 디자인인 거 같으니 내려놓고야 만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디자인의 옷들도 발견한다. 나는 엄두조차 안 나지만 새로운 옷 가게로 들어설 때마다 꼭 한두 명씩은 그런 옷들도 소화해낸 멋쟁이들이다. 나만의 보물찾기를 계속하는데,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 오늘은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처음 혼자서 와본 날이라 그런지 자꾸 베테랑이 된 듯한 기분이다. 기회는 다음 주 공강, 다다음 주 공강에도 있으니까, 이 기분만 안고 나는 버스 기사님을 뵈러나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