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창문에 빗줄기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날씨를 미워할 필요는 없는 게, 경주 터미널에 거의 다 왔기 때문이다. 꼭 세 살배기 우리 조카의 실력 같다. 버스 창문으로 빗줄기의 낙서가, 조금 있음 만나게 될 우리 둘째 조카의 스케치북을 빌려 놓은 것 같다. 빨리 내리고 싶어라.
내려서 택시를 타고 성건동인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택시 뒷자리에서도 빗줄기는 계속 창문 바깥에 즐비한 이팝나무의 장관을 가렸다. 무려 일 년만의 방문이지만 자주 드나드는 아들인 척하고 싶어서 초인종 대신 우체통 속에 든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올 때마다 매번 달라져 있는 마당이다. 별로 넓지도 않은 곳에 화분을 얼마나 갖다놨는지, 크기도 제각각인 게, 마치 절간에 빼곡히 쌓인 돌탑들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학준이 왔나?”
나를 반기기 위해 현관문 앞으로 달려 나온 엄마. 내가 혹시라도 비를 맞고 온 건 아닌지 걱정부터 한다. 나는 자상하게 굴면 될 것을 여전히 무뚝뚝하게
“피곤해 죽겠다. 빨리 밥 먹고 잘래.”
그나마 내 캐리어마저 빼앗아 들어주려는 엄마의 그 손만큼은 뿌리쳤다.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걸터앉은 아빠의 모습이다.
“어서 온나. 오래 걸리더제?”
어서 와라는 인사였는데,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빠를 지나쳐 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짐을 풀면서 잠잠히 생각에 빠졌다. 내 아빠는, 내가 얼마 만에 집에 오든지 간에 어서 와라는 식의 인사를 먼저 건네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인사는 너무나 부드러웠는데 예전과는 달리 아빠가 무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나는 낯설게 느껴졌다.
“도윤이하고 도아는?”
짐을 다 풀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조카들에 대해 물어봤다. 정말로 궁금한 것도 맞지만, 엄마가 부엌으로 떠난 뒤 아빠와 단둘이 남겨진 상황이 조금은 어색해서였다.
“너희 누나 집에 있겠지. 걔들을 와 여기서 찾노?”
내가 너무 오래간만에 왔다는 게 들통이 나고야 말았다. 마지막으로 왔었던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육아에 미숙한 누나가 조카 두 명을 돌보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엄마네 집에서 자주 머무르곤 했다. 그동안 많이 늘었는지 누나도 이젠 혼자서 육아를 책임지나 보다. 오늘 밤은 여기 부모님 집에서 자고 내일 일어나자마자 조카들을 만나러 가야지. 그나저나 밥은 언제 다 되려나, 아빠와의 공기가 어색한 나머지 나는 부엌으로 달아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