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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준 Sep 29. 2023

잠실에서

평소 습관이기도 하지만 이번엔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스벅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직 퇴근 전일 친구한테 카톡을 남긴 뒤 네이버 지도로 스타벅스를 검색했다. 서울이 게임 속 던전이면 가장 흔한 몹*이 스타벅스일 텐데 어쩐지 잘 나타나질 않는다. 열심히 핸드폰 속을 뒤져봐도 오백 미터는 더 가야 하나 있다. 전철역 출구를 다 빠져나와서 주위 간판들마다 쓰여진 ‘롯데’란 글씨를 읽었을 때,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참! 여긴 롯데라는 괴물이 다스리는 잠실이지.       


대로변을 걷다가 우측 가로수 이파리들 너머에 석촌호수가 보인다. 대로변과 석촌호수의 둘레를 이어주는 내리막길도 나 있다. 한번 내려가 볼까 하다가, 이따 친구랑 같이 걸어야지 아껴두고 스타벅스를 향해 계속 직진했다. 근데 내리막길이 또 나 있다. 또 내려가 볼까 하다가, 멀찌감치 호수를 눈으로만 담고 참았다. 대로변의 보행로가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곡선과 멀어져야 할 때, 마지막으로 나타난 내리막길에서 한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리막길에 새겨질 듯 노인은 주춤주춤 느린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손은 지팡일 쥔 상태인데, 왼손을 보았더니 내리막 길가에 핀 꽃나무 가지들을 붙잡고 가는 중이었다. 지팡이로 내리막의 경사를 이겨보고자 했으나 잘 안되셨던 게다. 나는 재빨리 쫓아가 “할머니” 불러서 왼팔을 가누어드렸다. 혹시나 꽃나무 가지라도 꺾일까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할머니는 조심스레 내게 몸을 기대셨다. “아고 고맙네.” 평지인 석촌호수의 둘레까지 할머니를 데려다드리고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내려왔던 길을 되올랐다. 길가에 핀 꽃나무들은 연약하지만 아주 보탬이 되었다. 그럼에도 활짝 웃음이 안 나는 건, 나뭇가지 말곤 붙잡고 갈 게 없는 이 오르막 변의 허전함 때문이었다.     


*‘몬스터’를 줄여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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