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1
서른이 훌쩍 넘은 나를 기억이나 할까. 대학 시절 영화 <밀양>에 꽂힌 나머지 싫다는 친구들을 이끌고 여기 밀양에 찾아왔었다. 밀양시 전체가 영화 촬영 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나는 마주치는 곳마다 걸음을 뗄 수 없었고, 영화를 안 본 내 친구들은 나보고 오버하지 말라고 그랬다. 당시 밀양에 와서야 깨우친 사실이 있다. 영화에서는 밀양이란 이름을 ‘secret sunshine’으로 해석하는데, 실제 밀양시의 뜻은 ‘빽빽하게 햇볕이 드는 곳’이었다. 그 뜻대로 오늘도 밀양엔 햇볕이 가득하다. 구름도 알맞게 피었다. 친한 누나의 결혼식 때문에 칠여 년 만에 찾아온 밀양인데, 나를 기억해 주는 것만 같아 아찔한 기분이 든다.
밀양역 앞에서 대학 시절 마냥 버스를 탈까 하다가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과 오늘 날씨에 대한 칭찬을 나누면서 가다 보니 예식장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강변에 자리한, 밀양에서는 눈에 띌 만한 큰 호텔이었다. 코로나 시국이 풀렸으니 밀양의 예식장 안도 서울과 같이 붐빌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줄 서서 놀이기구 타듯이 그렇게 금방금방 치러버리는 현장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의 주인공인 둘은 얼마나 마음을 조렸을까. 누나와 형의 연애를 오랫동안 지켜봐 오며 둘은 이미 연인에서 부부가 될 준비를 마친 듯한데 결혼식 날짜만 미뤄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었다. 예식장 안에서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그동안의 기다림을 잘 이겨낸 그야말로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두 주인공과도, 또 하객으로 와 있는 내 지인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남들보다는 조금 먼저 예식장 안을 빠져나왔다. 칠여 년 만에 찾은 밀양이니만큼 나 혼자서 조금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대가 높았던 호텔에서 낮은 강변 산책로로 내려와 보니, 날씨가 그야말로 밀양密陽*. 앞쪽이 밀양역 방향이란 것만 깨닫고 나는 아무런 생각 말고 걸었다.(밀양 2에 계속)
*密陽: 빽빽한 햇볕
밀양2
걷다가 보니 결혼식을 위해서 입은 내 검은색 복장이 강변의 햇살을 자꾸 빨아들인다. 윗도리를 벗어서 한쪽 팔에 걸치고 강줄기를 따라서 계속 걸어갔다. 대학생 때 올라가 봤던 영남루가 혹시나 나타나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찰나,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다. 과식은 아니었으나 뷔페에서 한꺼번에 다양한 음식을 먹었으니, 위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차분하게 걷다 보면 당연히 배를 꺼뜨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배 아픔의 통증은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절대로 방심하지 말아야 할 통증이란 게 있다. 걸을수록 나는 지금이 바로 그 통증이란 걸 확신하게 된다. 다시 지대가 높은 도로 쪽으로 올라가야 화장실을 찾을 수 있겠는데, 불행히도 도롯가 역시 산책로일 때와 마찬가지로 건물은커녕 차도 잘 다니질 않았다. 택시가 당연히 안 잡힌다. 한 대 지나가는 버스는, 버스 정류장도 없는 그쪽에 서서 무얼 할 작정이냐고 나를 조롱하고는 다리를 건너가 버렸다.
그래, 저기 다리를 건너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 같기도 하다. 밀양역으로 돌아가는 방향과 일치하느냐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다리를 건너갔더니 다행히 건물에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 아르바이트를 해봐서 아는데 대부분의 편의점 실내엔 직원용 화장실이 마련돼 있다. 다급히 문을 열었더니만, 이럴 수가 잠긴 게 아닌가. 직원분이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인가 보다. 이게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밀양>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 정신이 이상해진 상태로 밀양을 활보하듯 나도 계속 화장실을 찾아 걸어야만 했다. 사람이라도 보이면 붙잡고 물어나 보겠는데.
“저기… 갔다 와서 시킬 건데 혹시 화장실이 어디예요?”
점심시간을 넘긴 중국집엔 주인장 부부만이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신문을 내려놓다가 내 표정을 읽은 아저씨께서 부엌 바깥쪽 화장실을 가리켜 주신다. 마침내 발견해 들어온 곳이었다. 아주 오래된 중국집이어서 화장실 또한 노후했지만, 상관없이 열려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화장실을 다 사용한 후 수줍게 나타난 나는
“제가 사실은 잔치 갔다 오는 길이라 식사하기가 좀 힘들거든요. 이걸로 짜장면 한 그릇만 결제해 주세요.”
내가 화장실에 들어 있는 동안 요리가 시작됐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당연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장 부부는 동시에 똑같이
“먹지도 않아놓고 뭐 할라꼬예. 괜찮으니까 가보이소.”
하는 수 없이 인사만 드리고 가게를 빠져나와야 했다. 창피해서 빨리 이 거리를 뜨고 싶은데 택시는 겨우겨우 잡혔다. 밀양역으로 가주세요 말씀드리고 정신을 차렸다. 오늘 점심 장사가 잘 안됐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내가 괜히 들어가서 파리 역할만 해버린 건 아닌지, 오래된 중국집 부부한테 자꾸만 키가 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