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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Feb 14. 2017

리우 웨이 개인전 <파노라마Panorama>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본, 리우 웨이 개인전 <파노라마Panorama>

 2016년 4월 28일부터 2016년 8월 31일까지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는 중국 현대 작가인 리우 웨이Liu Wei의 개인전 <파노라마Panorama>를 개최했다.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플라토는 문을 닫았다.

 리우 웨이는 1972년 베이징에서 출생한 중국 현대미술 작가로 그는 지금까지 작품에서 “끊임없는 개발의 현장이 된 중국 또는 아시아의 디스토피아적 도시”1)에 대해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즉 리우 웨이의 관심사는 중국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라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영상, 설치, 드로잉, 조각, 페인팅 등 분야를 가리지 않으며 대부분 해체와 재구축의 형태로 되어 있어 사실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이 어렵다. 다만 그는 4월 28일 전시 개최와 함께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 프로그램에서 “나에게 예술이란 ‘현실’을 ‘진실’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의 출발점이 그의 주변을 둘러싼 ‘현실’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작가가 제시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창이며 작가 자신이 사회(현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선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중국 미술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사회, 문화적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작가들은 포스트모던과 후기 식민주의 시대라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중국 내의 권위를 끊임없이 전복하고 초월해야 하는 한편 새로운 국제적 언어를 받아들이면서도 담론적으로 미국 및 유럽이 주축이 된 문화적 헤게모니를 비판해야만 했던 것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글로벌 문화 안에 존재하는 주변과 중심, 민족성과 현대성, 지역성과 국제성, 관념과 언어, 개인과 사회, 글로벌리즘과 민족주의 등의 문제를 독자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기 시작”한다.2) 리우 웨이 역시 이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관심사인 중국 혹은 아시아라는 공간은 그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후기 식민주의 시대,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서양의 반대로서의 동양, 그러한 국제에 상대적으로 지역인 본인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대한 재고이다. 결국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이란, 상대적으로 지역이며 주변인 (혹은 주변이었던) 아시아라는 현실을 해체하여 본래의 형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 형태로 다시 제시하는 것인데 이 새롭게 구축된 현실은 관객들에게 각자 다른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리우 웨이가 아시아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작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현실’에서 그러한 특징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동양적인 것’ ‘서양적인 것’과 같은 구분은 사실 실체가 없는 허상뿐인 개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혐의는 동양적인 것을 획득한 서양의 것을 동양적이라고 하지 않고 서양적인 것을 내부에 획득한 동양의 것을 서양적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려볼 때 더 확연해진다 이러한 개념들은 여기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도 아닌 곳에 머무르고 있다 이때 동양과 서양의 대비적인 개념은 흑인과 백인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아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찮은 실수 Ⅱ No.1 Merely a Mistake Ⅱ No.1, 2009-2012, doors/doors frames/acrylic board/stainless steel.3)


 본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파노라마>전에 전시되었던 리우 웨이의 조각 작품, <하찮은 실수Merely a mistake>이다. <하찮은 실수>는 “리우 웨이가 2009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조각 작업으로, 그가 거주하고 있는 베이징의 수많은 재개발 현장에서 수집한 건축 폐기물을 재료로 상상의 도시를 재구축”해내고 있는 작품이다.4)

 작품에 주로 사용된 건 녹색 주조의 문짝과 창틀인데 이는 중국의 학교나 병원과 같은 공공기관 건물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중국 사람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다. <하찮은 실수>는 다른 작품들과 분리되어, 전시 공간 하나를 가득 채운 형태로 관객들에게 보여지는데 이것이 작가 자신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작품을 배치한 큐레이터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배치 형태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마을을 떠돌고 있는 여행자가 된 것 같은 감각을 준다. 개개의 작품들은 일단 크기로 관객을 압도하는데 그 앞에 서서 작품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거대한 조각, 건축처럼 보이는 그 조각들을 이룬 것이 낡은 건축 자재들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문고리나, 경첩, 수도꼭지도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렇게 만들어진 건축적 풍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전부 중국 더 자세히 말하면 베이징에서, 크게 잡아서 말하면 아시아에서 온 것이지만, 일종의 현대화 된 건축적 소재들이다. 이때 현대화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화 혹은 근대화라는 것이 서구를 따라가는 것, 따라가서 서구의 현대라는 시간을 따라잡는 것을 의미하던 때에 현대화는 ‘서구처럼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서구가 될 수 없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현대화는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현대’를 무엇이라고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할 것인가.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가지고 어떠한 풍경을 그려내는데 각각 개별의 조각들이 내 눈에는, 고딕 형식의 성당, 오래된 유럽 중세의 성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이 공간은 유럽 중세의 장원과 같은 공간으로 변했다. 고딕 형식의 성당이나 유럽의 고성의 이미지는 실제 그곳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도 거대한 성당과 성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의 작품 자체가 제작되는 과정과 그리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들 자체에 대한 논의를 서로 나눠서 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작품이 제작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 작품은 앞서 언급했듯 건축 폐기물을 재료로 작가가 상상으로 구축해놓은 풍경이다. 한 번 파괴된 것들을 가져다가 다시 재건축한 것이다. 이는 뒤집어, 재건축되었으므로 다시 파괴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 파괴와 재건축은 작품이 존재하는 한, 어쩌면 시간이 흐르고 있는 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계속 될 것이다. 이를 전시 리플렛에 전시 기획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 “양식과 시간성이 혼재하는 이 유사-기념비들은 작가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며, 파괴와 재건축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의 외관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소멸되고 재편되는 역사와 기억, 가치관과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5) 분명 맞는 말이다. 리우 웨이의 작품은 그렇게 읽힌다. 어떤 의미에서 시간도 공간도 없는 이 건축물들은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살 수 없는 공간인데 건축물이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이러한 건축은 아이러니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건축처럼 보이는 작품을 작가는 그저 조각이라고 칭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제 누구도 살 수 없는 이 건축을 구성하고 있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이전엔 누군가를 살게 했던, 삶의 공간을 만들었던 자재들이다. 이렇게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방금 적은 내용들은 내가 처음 이 전시를 보고 왔을 때 돌아와서 정리한 내 감상들이다.

 다만 의문이 들었던 지점은, 그리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이 이미지들 자체가 내게 서구 중세의 풍경들을 불러일으키고 연상 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자신이 어떤 재료를 택해 어떤 과정으로 그것을 재구축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만 결국 그 재구축의 이미지가 무엇을 표상할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 표현은 앞서 내가 썼던 말과 조금 어긋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이 말들도 정확히 전달될 수 있을지 기대하기 어렵지만) 무언가를 재구축할 때 작가는 본인의 상상에서 떠오른 풍경이 재구축하기 전처럼 익숙한 풍경일지도 모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풍경일지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리우 웨이의 작품적 특징이 모호함이라면, 작가는 그 모호함으로 모든 것을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을 반성에 있어서 태만함이라고 비난해야 할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미지들은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내게 익숙하게 달라붙어 있는 이미지였기에 작가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인 ‘아시아적’ ‘디스토피아’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디스토피아의 앞에 오는 말인 ‘아시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리우 웨이를 지칭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중국’ 차세대 ‘현대’ 작가라는 표현인데 대개 리우 웨이 작품을 비평한다고 하면 '현대'에 방점을 찍을 뿐 그가 정말 ‘중국’적인가에 대해서는 잘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재료들이 ‘중국’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의문들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곤 아마 이 정도일 텐데, 어쩌면 ‘정말로 아시아적’이고 ‘정말로 중국적’인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계속 언급하고 주목하고 있지만 늘 정말 그걸 언급하고자 하면 빠져나가버리는 이 개념들을 정말로 거기에 여기에 아니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걸 굳이 탈식민주의 논의에서 언급하고자 했던 건 커다란 의미에서 탈식민주의란,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 colonialism의 번역어로서 탈식민주의의 밑바닥에는 “탈중심의식, 즉 총체화 되고 체계화하려는 보이지 않는 모든 지배 집단에 저항하는 피식민지인의 의식”6)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논의에서 조금 빗나가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백인-흑인-황인이라는 언어적 개념조차 일종의 억압이라고 보는데 언어의 중립성은 실상 허상이며 이렇게 인종을 구분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단어들에는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한편으로 사람들의 내면과 개별성은 전부 무시한 채 그저 색깔로만 판단하고자 하는 욕구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 외에 이것을 지칭할 다른 무언가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1) 삼성미술관 플라토 전시 <리우 웨이 PANORAMA>(2016.4.28~8.14) 의 리플렛, 전시 서문

 2) 민은주, 중국현대미술에 나타난 이미지 차용과 재현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2008, pp. 36~37

 3) 좌측 사진은 직접 촬영한 것, 우측 사진은 전시 리플렛에 수록된 사진, 작품 상세는 리플렛에 기재된 것을 따름

 4) 위의 리플렛, 작품 설명

 5) 위의 리플렛

 6) 김성호, 이원일의 큐레이팅에 있어서의 “제4세계”론- 탈식민주의를 중심으로, 미학예술학연구 40권0호, 2014, p.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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