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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Jun 03. 2018

어둠 속에 빛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된다.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의 시인의 말에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 나는 아직도 이런 일을 생각한다.” 유희경의 시는 나와 당신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 시들이 두드러지는데, 그렇기에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은 시인에게 있어 중요하다. 단어가 선행하는 것도 한 사람이 선행하는 것도 아닌, 그 둘이 동시에 온다는 것. 그건 돌이켜서 수십 개의 단어가 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한 사람이 수십 개의 단어가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나와 당신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어두운 거리는 이런 식으로 어쩌면 조금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나와 당신은 그저 나와 당신이기에 슬프지 않은가?)

 이번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의 첫 수록 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Ⅰ)」에서는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가 탄생하는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와 당신이 갈라지는 순간은 어떤 인칭이 나타나는 순간인데 그 순간에 어둠은 탄생한다. 두 번째 시집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의 시인의 말에서는 이렇게 적는다. “사람 사이 부드러운 것이 있어/ 누가 단단한 것을 굴리고/ 여태 나는 찾고 있다/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와 당신의 사이,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그 어둠이 “부드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 부드러운 어둠 속으로 “누가 단단한 것을 굴리고” 시인은 어떤 소리를 듣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다가왔는지” 부드러운 어둠은 모래에 비유되기에 무너져 내릴 때면 마치 파도처럼 밀려가고 밀려올 때 내는 소리를 낸다. 시인은 그 소리로 다른 인칭이 그러니까 당신이 얼마나 다가왔는지를 듣는다. 당신이 완전히 다가왔을 때 어쩌면 당신은 내가 될 것이다(「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Ⅱ)」에서는 “당신이 나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라고 쓴다)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그런 식으로 나와 당신은 영영 어두워질 것이다, 계속.

 이 영영 어두워지는 행위는 시인에게 인칭의 죽음임과 동시에 태어남이 내정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찾고 있는데 그 소리는 어쩌면 그 어둠에서 왔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Ⅱ)」의 “(…) 잠시 동안 종말이다 무덤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 당신이 버려놓고 태어날 그때의 자국 당신과 당신과 당신을 낳은 우리들의 그림자에게는 당연한 일이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중이다 영원히, 영원이라는 말이 있다는 바로 그곳이다 나도 당신도 아니고 우리의 중간쯤에서 어딘가로”라는 부분에서 그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당신 사이의 어둠이 있다.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질 수 있다. 시인은 이미 그렇게 쓰고 있다. “당신과 당신과 당신을 낳은 우리들의 그림자”가 있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나와 나와 나를 낳은 우리들의 그림자”가 있다. 잠시 동안의 종말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중으로 이후 연결되는데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건 영원히다. 잠시간의 종말은 영원과 연결된다. 깊은 바닷속은 시인에 의하면 “나도 당시도 아니고 우리의 중간쯤 어딘가”이며 이게 우리 사이에 있던 부드러운 어둠임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렇다. 나와 당신은 이런 식으로 잠시, 영원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영영 어두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나와 당신을 낳은 것은 그림자, 그 어둠 자체다. 그렇기에 당신에게는 “무덤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가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버리고 태어나겠지. 이상한 일이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그 어둠은 여전히 나와 당신 사이에 존재하고 나와 당신은 그 어둠에서 태어나기도 했으며 언젠가 그걸 버리고 태어날 것이다.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듯. 다시 떠올린다.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은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어쩌면 인칭/인격은 꿈이 아닐까?

 미드 트루 디텍티브 3화 ‘잠긴 방’이라는 에피소드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넌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거야. 사진 속이라도 말이지. 그들이 살았는가 죽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넌 여전히 그들을 읽을 수 있고, 그들이 뭘 본 건지 알 거야. 그들은 환영해. 처음엔 아닐지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렇게 돼. 그건 틀림없는 안식이지. 그들은 두려워했었고 지금은 처음으로 얼마나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내기 쉬운지 아니까. 마지막 찰나에 그들은 본 거야. 그들이 무엇이었는지. 그건 너, 너 자신의, 이 모든 거대한 드라마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추측되는 것들과 말 못하는 것들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냥 놓아 보낼 수 있어. 결국 이걸 꽉 쥐고 있을 필요가 없거든. 깨닫게 되는 거지. 모든 네 인생과 너의 모든 사랑, 미움, 기억, 너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다 같은 거였던 거야. 전부 다 같은 꿈, 네가 너의 잠긴 방 안에서 꿨던 꿈,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꿈. 그리고 많은 꿈들처럼, 그 끝에는 괴물이 있지.”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인생, 모든 사랑, 미움, 기억, 고통, 이 전부가 인격이라고 하는 잠긴 방 안에서 꿨던 꿈이 아닌가. 그런 인격이라는 잠긴 방을 나가면 그 바깥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사실 시인은 인격이 꿈일지도 모름을 알고 있다.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이 동시에 떠”오르는 건 자신의 머릿속에서이고 그렇기에 꿈일 수도 있음을. 「빈집」이라는 시를 보자. “(…) 꿈은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아 불안처럼 남는 것만큼만 믿을 뿐이지 우리의 운은 바닥나버렸고 각자 옷을 챙겨 들었다 아직은 춥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가 불을 껐을 때, 어쩌면 불이 꺼진 게 아닐지도 모르지 다시 불을 밝힌다 해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누군가 이사라도 가버린 것처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나는 내가 잠들어 있고 이것은 꿈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창문 하나 없는 빈집같이 깜깜한” 모든 것이 어두워졌기에 어쩌면 나와 당신을 개별적 존재로 만드는 일은 그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 빛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된다. 그러나 그 불이 꺼졌을 때 불은 꺼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나는 없었고 그렇기에, 불을 밝‘혔’던 나와 불이 꺼진 뒤의 나, 다시 불을 밝혔을 때의 나는 전부 다 다른 나이니까.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 어둠뿐만 아니라 빛(불) 역시 마찬가지다. 「主人」이라는 시에서 “빛은 우리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포함하고 너무 포함하고/ 깊이 포함해서 결국 지워져버린다”(지워져버리는 건 우리인가 빛인가?)라고 시인은 적는다. 너무 많은 빛은 어둠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단어」라는 시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사라진 당신은/ 당신 아닌 것들만 남아 당신이 되었고// 나는 아주 작고 아득한 단어를 날리고/ 세어본 것이다/ 쓸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단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것은/ 날아가버렸고 도저히 돌아올 수 없으니”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은 사라졌지만 실은 당신은 내 곁에 있다 다만 그 당신은 당신 아닌 것들이 남아 당신이 된 그런 당신이다 내가 알던 당신은 꿈에 남아 있는가? 아니면 깨어나서 다시 꾸게 된 이 꿈의 다시 밖에 있는가? 당신은 돌아올 수 없는 영역으로 가버린 그 쓸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단어들과 같은 영역에 존재한다 그 영역은 어쩌면 위의 대사에서 말하는 “괴물”이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이라는 시에 이르면, 아니 이르기 전에 어두워지는 시간과 나와 당신이라는 관계를 잠깐만 편편이 조금 더 보자. "어둑해지는 두 사람의 시간이/ 한 사람의 사물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만지고 또 만져본다// 바래져간다 마음이 당신이 아닌 것처럼/ 나와는 아주 달라서 나란히 앉아도/ 마주 보게 되는 그런 일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참 가늘다 어떤 날은/ 직선의 소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났다"(「직선의 소리」) 이 시의 이 부분은 두 번째 시집의 시인의 말과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을 포괄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의 시인의 말에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타나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은/ 우리들의 옛 마음에게”라고.  재미있는 부분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 않았기에 사라지지 않은 걸까?) 사라지지도 않은 (나타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의 동의어가 아님을 잠깐 엿볼 수 있고 나타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으며 더 나아가 존재하지 않음이 사라짐과 동의어가 아님도 역시 엿볼 수 있다 잠긴 방에서 꾸는 꿈 너머의 세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혹은 잠깐 동안 영원이 되었다면) 마음이 '옛'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과거가 되었다. "바래져간다 마음이 당신이 아닌 것처럼"

 여기서 소리라는 감각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무엇이든 소란의 곁으로 다가갔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알게 되었지/ 그때 들었던 거야 사라질 듯 다가오는/ 색과 빛의 세계 말하지 않았지만"(「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 이 부분과 첫 수록 시에서 말했던 소리가 어떤 소리였는지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그건 인칭의 무게, 당신이 다가올 때 나는 소리였다. 어둠이 모래가 되었으므로. 그렇기에 위 인용구에서도 그 소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알게 되었"다고 적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된 건 "색과 빛의 세계"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는 세계. 아주 잠시간의 세계. 그런 세계에서 기인한 "우리들의 옛 마음", 이 세계와 이 마음은 시인에게 있어서 시의 세계겠지. 시는 이곳에서 왔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난 것처럼.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이 "색과 빛의 세계"가 어둠에서 태어났음을, 빛은 우리를 포함하고 너무 포함해서 오히려 지워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어둠에도 빛에도 너무 많은 인칭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불을 밝혀 내가 나임을 표명한다는 것을 그러나 불을 끄고 나면 그곳에는 처음부터 어둠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 나는 너무도 불확실한 존재임을, 당신이 아닌 것들이 당신이 된 것처럼. 그렇지만 거기에 있는 것이 있다. 빛이 우리를 포함하고 너무 포함해서 지워버리는 건 처음부터 우리가 빛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반짝이는 것들, 생명이어서 금방/ 따르고 차오르는 것들 되었네/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울고 싶어지는 검고 흐릿한 사물/ 그러니 문득 모두 거기에 있고, 외마디만큼만 멈춰 있었네"(「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


2018/5/26, 토요일, 스터디에 들고 간 발제문 수정,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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