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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Oct 14. 2019

리뷰를 리뷰할 때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살아 있는 시들』, 문학과지성사, 1992

비평은 작품이 갖고 있는 여러 의미 중의 하나를 붙잡아내서 그것을 남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지적인 작업이다. p. 13, 「김춘수에 관한 두 개의 글」     


시를 분석하기 전에 그 시에 관한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는 것은 시를 자료 더미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모든 울림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그 시를 살기 위해서이다. p. 34, 「전봉건에 관한 두 개의 글」     


시는 삶과 절연된 어떤 것이 아니다. 시는 혼돈스러운 삶에 대립하는 아름답고 깨끗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시는 삶과 마찬가지로 지지하고 더럽고 생기 없는 것이다. 그 더럽고 지지하고 생기 없는 것들이, 희망 없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광휘로 작용한다. 누군가가 나처럼 그런 삶을 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삶은 위로받을 수 있고 역시 마찬가지로 남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p. 46


인간이 다만 기능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그 존재론적 충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간을 정보의 덩어리로 생각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며, 사람 저마다는 자신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는 성실한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인간은 죽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론적 여건이다. 그때 인간은 다시 자연과의 친화력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p. 188, 「인간이라는 기호의 모습」     


착하고 아름답다는 보편적 속성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모호한 주관적 속성이다. (…) 그것은 원형이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책을 안 읽을 수는 없다. 거기에는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원형에 대한 꿈을 상실할 때 삶은 한 비평가의 표현을 빌면 짐승스럽고 더럽고 치사한 어떤 것이 된다. 책 속의 원형들은 이 세계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으며 우리는 왜 불행한가 하는 것을 반성케 하는 표지들이다. 그 원형들이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으면 그 원형들을 생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삶은 최소한도의 초월성을 간직할 수 있다. (…) 책읽기는 결핍이나 불행의 몸짓을 연습하는 움직임이 아니리 자기가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읽기는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 예전에는 무당, 점쟁이, 교사들이 세계라는 책의 의미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석해주었지만 (…)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저마다 무당이며 점쟁이며 교사여서 어느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가를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다. (…) 세계는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pp. 232~233, 「책읽기의 괴로움: 최인훈」, 『책읽기의 괴로움』     


사람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난다. 이야기는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이야기가 없어질 때 사람은 죽는다. 다시 말해,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 있다. p. 237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면, 작품 역시 그러하다. 그것을 쓰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p. 268, 「(보론)소설의 구조」     



리뷰를 쓰려고 보니 약간 리뷰를 리뷰하는 느낌 들어서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 스무 살 때 사두고 김춘수 파트만 읽고 꽂아두기만 했던 이 책을 오래간만에 꺼내서 다 읽었는데 많은 김현 전집 중에서 하필 이 책을 골랐던 것은 역시 제목 때문이었다. ‘책읽기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왜냐면 내가 책을 읽으면서 괴로웠으니까 그땐 과제 때문에 매일 밤새고 생명이 깎여 나가고 한 주에 책을 서너 권씩 읽고 매주 리뷰를 두 편씩은 가져갔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때였어. 휴. 노는 거 아니면 이제 밤 안 샐 것이다. 그리고 이걸 쓰고 있는 지금 시각 새벽 두 시. 거 봐 인셍 부질없어……


김현과 같은 방식으로 읽는 것은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기형도의 시집 발문에 그런 글을 써줄 수 있던 건 아마 김현 정도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빛은 언제나 빛이듯, 빛나는 부분들은 여전히 빛나고 내가 김현에게 영향을 받을 정도로 사랑했던 부분들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어떤 사람이 유치환의 시편들을, 깃발의 노스탤지어의 정서를 사랑의 상실과 연결해서 그의 사랑 시를 중심으로 읽어나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김수영의 「풀」에서, 그 풀밭에 누군가가 더 있음을, 그 시선을 누가 포착할 수 있을까? 「풀」이 풀과 한 사람에 대한 시가 될 때 그 시는 더 이상 민중의 시로는 머무를 수 없게 된다.  


 스무 살 때 학부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문학 수업을 들을 때 손창섭의 소설을 읽으며 미소지니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선생님은 현실의 여성과 비유로서의 여성을 구분해서 설명하셨다. 그렇다고 그의 여성혐오가 가려지고 잊혀질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서, 나는 그 이후 다시 손창섭을 읽지 않았다. 그의 그 폭력적인 세계를 견딜 수가 없었고 그걸 비유로서의 여성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비유로서의 여성이면 괴롭힘 당하고 폭력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윤리적인 글만이 좋은 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윤리에 대해 적어도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한때 이청준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서편제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예술과 한이라는 정서 뒤에 가려진 여성의 희생 서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 비평 내에서, 김현은 어떤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여성적인 노동은 비생활적이다”라는 문장을 썼다. 나는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동안 멈춰 서서 생각했다. 1980년대의 시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1942년에 출생해 1980년대에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시선으로. 예전에 읽었던 논문이 떠올랐다. 그 논문에서는 적고 있었다. “여성의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의무였으며 도덕이었다”라고. 의무였고 그게 도덕률이었다면 비생활로 판단되는 것은 옳을 것이다. 스무 살 때는 이런 부분을 전혀 자각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지. 묘한 불편함은 그냥 불편함으로 두고 빛나는 부분만을 채집하기에 바빴고 사실 그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좋은 것만 보기에도 내 시간은 부족하고 불편함을 계속 건드리기에는 내가 체력이 부족하다.


 예전에 썼던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제0장」을 다룬 비평문에 나는 그것을 사랑 소설로만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더할 나위 없이 여성혐오적이다. 체화되어 있는 혐오의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여성들에게 체화된 여성혐오의 감각은 주로 자기 감시의 형태다. 나를 바라보는 것은, 나의 시선이다. 이건 존 버거가 이미지에 대한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근데 또 남자네. 넘나 웃겨… 김현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최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부분들은 지워보거나, 다른 식으로 말을 바꾸거나 하는 식으로 편집하며 읽어보았다. 사실 내가 위에서 인용한 부분들에서도 여성적인 무언가라거나, 여성성이라거나 하는 문장들이 있었다면 지워서 인용했다. 다들 어디에 그런 문장이 들어있었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그건 사실 없어도 됐다는 것이지. 굳이 그걸 거기에 끼워 넣는 건 그렇게 쓰는 것이 체화되어 있는, 이를테면 그렇게 써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저 돌봄이라고 쓰면 될 것을 “여성적인 돌봄”이라고 쓰는 것과 같다. 이것도 책 읽던 중에 나온 문장이었다. 왜 돌봄이 여성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결국 문학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체화된 혐오가 아닌 사랑에 대한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며, 그 모든 것을 늘 뛰어넘는 무언가, 생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실체가 없기에(노장사상에서 말했던 도와 같은 것이다) 닿을 수도 잡을 수도 없기에 그저 비유라는 방식으로만 말해져야 하는 그런 것들. 그렇기에 체화된 여성혐오가 그 자리에 존재해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래된 글들을 읽는다. 그리고 고통 받고 화를 내고 막 이런 글을 쓴다. 그 외에도 옛 작품들을 읽는 데에는 다른 의미가 수없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시선을 바꾸거나, 몸을 바꾸어보기 위해 읽는다. 같은 감정은 그때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영원히 같을 것임을 보기 위해서.


 다시 내 이야기인데, 히구치 이치요의 「키 대보기」라는 작품을 원어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어가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여성주의 비평에 대해, 그런 식으로만 읽는다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건 이상한 말이었다. 히구치 이치요의 그 소설은 그 당시(메이지 시대) 사창가를 다큐적으로 다루고 있었고 주인공인 미도리 역시 언젠가 그곳에 몸을 위탁하게 될 여자아이였다. 그런 소설을 여성주의적 시선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 안 좋다는 것일까? 어떤 소설을 굳이 여성주의 비평으로 읽어보려고 하는 건, 지금까지의 모든 비평들이 남성의 시각이었으며 심지어 여성들의 세계를 다룬 작품들 역시 철저히 배타적으로 남성적인 시선에서 독해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언어라는 매체는 너무나 보수적인 매체라서 굳이 의식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폭력적이다. 이런 과정들을 계속 반복하게 하기에 아마 책읽기는 괴로운 것이 맞다. 이건 김현은 낼 수 없던 책읽기의 괴로움이다. 이렇게 적으니 대체 왜 읽고 있는 거지 싶다. 약간 김현 식으로 적는다면, 삶에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러니까 감각할 수 없는 것이(칸트는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휴 이 보수주의자 그렇지만 가끔 칸트의 이런 자기방어가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음 동질감일지도 모르겠네) 문학에는 분명히 존재하기에 읽는다. 가능성들에 대해 상상하기에 읽는지도 모른다. 읽는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땅한 말이 없어지기에 읽는다. 언어라는 게 다 그렇다. 불완전하고, 삶이 불완전하고 사람들도 다 불완전하니까 언어와 문학도 그런 거겠지.


 그렇지만 체화된 혐오는 그저 감각인 것이겠지만, 김현은 이 책을 여는 첫 부분에 굳이 “비평은 작품이 갖고 있는 여러 의미 중의 하나를 붙잡아내서 그것을 남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지적인 작업”이라고 썼고, 혐오는 지적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것이지 않나. 물론 김현의 글은 여전히 좋고 지금 읽어도 이렇게까지 이 작가들을 수평선 너머로 끌어올려줄 수 있는 비평가는 드물 것 같다. 김현은 그저 김현이다. 그런 생각을 예전에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한다. 이런 리뷰를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잠깐 여성혐오의 문장들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는데. 김현의 미덕은 역시 시 읽기에 있는 것 같다. 점프했다가 착지하는 지점들이 시에서 더 탁월하고 멀리 나아간다. 김춘수에서 김수영으로의 점프도 좋았고, 전봉건에서 종다리(김수영의 시에 나오는 노고지리가 종달새/종다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몰랐어 처음 알았어 왜 정규교육과정은 이런 거 안 알려줬지?)를 통해서 다시 김수영으로 점프하는 지점도 좋았다. 김현 전집 중에 행복한 책읽기라는 책이 있네. 궁금해지네. 언제는 책읽기 괴롭다고 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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