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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모시기

#POTD 9


아내와 함께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석파정에 다녀왔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넓고 경치가 좋은 정자가 있었다니?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세도가 김흥근의 별서였다고 한다. 별서는 별장과 달리 비교적 오랫동안 거주하는 공간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김흥근에게 석파정을 자신에게 매각하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대원군은 석파정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인 고종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김흥근은 임금이 묶었던 곳을 신하인 자신이 소유할 수 없다고 하여 석파정을 고종에게 넘겼고 그 후 대원군은 이곳을 별서로 사용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석파정을 차지한 셈이다. 아니면 김흥근이 알아서 모셨을 수도 있다.


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리 연구실에 10년 전쯤 있었던 대학원생들은 나와 음식 취향이 비슷했다. 식사를 같이 할 때 학생들에게 원하는 메뉴를 고르라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야채, 해산물, 회 등을 골랐다. 한 번은 세미나를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나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같이하지 못했다. 며칠 후 연구비 카드로 결제한 내용을 보았다. 영수증에는 평소에 나와 학생들이 가지 않는 식당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식당은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곱창, 삼겹살, 돼지 껍데기 등을 파는 식당이었다. 나를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들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알아서 모신 것이다.


대학에서 시간표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아시는가? 우리 학과의 경우 요일과 시간만을 표시한 엑셀 문서를 학과의 가장 원로 교수에게 전한다. 그 원로 교수는 자신이 맡은 과목을 원하는 시간에 표시한다. 그 파일을 넘겨받은 두 번째 원로 교수는 자신의 과목을 원하는 시간에 적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시간표 작성은 계속된다. 그러면 학과의 막내 교수는 월요일 1교시부터 금요일 10교시까지 빈칸을 찾아가면서 시간표를 작성해야 한다.


이런 방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학과 교수는 학과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강의를 할 수 있는 정교수들은 자신이 조교수 시절 시간표 작성으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편리함을 당연히 여긴다. 내가 ‘예전에 주었던 것을 지금 받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조교수들 역시 언젠가 자신도 정교수가 되면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이런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얼마 전 구글 코리아 김경훈 대표의 강의를 들었다. 직원들에게 주차 공간을 배정하는데 사장을 포함한 임원들도 다른 직원들과 함께 추첨을 해서 주차 공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회의를 할 때에도 가능한 원탁을 이용해서 상석을 두지 않는다. 그런 문화에서 임원들은 불편을 느끼겠지만 창의적인 사고는 쉽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구글에는 왜 ‘알아서 모시는’ 문화가 없을까? 아마도 창업자들이 창업 초기부터 주지고 말고 받지도 말자는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형식을 거부하고 효율과 실리를 추구하는 실리콘밸리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알아서 모시는 문화’를 벗어낼 수 있을까?


누군가를 열심히 모셨던 시절을 뒤로한 사람들이 자신이 모셔지지 않도록 낮은 곳을 찾아다닐 때 알아서 모시는 문화는 한 걸음씩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갈 것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내려놓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일류 도공은 최상의 작품이 나올 때까지 자신의 도자기를 수 없이 깨버리지만 삼류 도공은 자신의 도자기를 깨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깨버릴 수 있는가?



* 본 글은 이전에 작성했던 '석파정 소나무'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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