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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달란트 빚진 자

내가 버스에 오르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기 앉으시죠!'라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계속 서 있었다. 그도 서 있다가 다음 정류장이 가까워졌을 때 건너편에 자리가 나자 그곳에 앉았다. 내 앞의 빈자리는 감히 아무도 못 앉고 있었고 뻘쭘한 그 상황이 어색해서 내가 그곳에 앉았다. 버스가 집을 향하는 동안 바로 전 몇 분 동안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자리를 양보받을 정도로 늙어 보여?'라는 나 중심적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결과, 나는 자리를 양보한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다음에 누군가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웃는 얼굴로 '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냉큼 앉아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내 마음이야 아직도 20대이지만 하얗게 뒤덮인 내 머리와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고 자리를 양보한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버스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감사를 표현하지 않아서 생겼던 과거의 섭섭함과 상처를 생각해 보았다.      

2주 전쯤 학부생 2명, 졸업생 2명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 일어나 계산대 근처에 서게 되었다. 서로 계산하려고 다투는 아름다운 모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계산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는 의외의 상황! 학부생들이야 그럴 수 있지만 잘 나가는 회사의 대리 이상으로 근무하는 졸업생들은 최소한 태클이라도 하는 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수비 없는 골대에 쉽게 공을 차 넣듯 내 카드로 침착하게 계산을 마쳤다. 그 후에도 고맙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못 들었나?     


집에 가서 아내에게 이 일을 말했더니 대수롭지 않게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한다. 아내의 말이 섭섭하게 들렸지만 잠시 후에 내가 학생 때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에 있을 때 한국에서 교환 교수로 오신 J 교수님이 계셨다. 어느 가을날 오후, J 교수님이 스폰서가 되어 우리 학과에 있었던 10명 정도의 한국 학생들이 테니스 시합을 했다. 교수님은 열심히 응원도 해 주시고 시상식에서 트로피도 수여해 주셨다. 우리는 행사를 마치고 바로 헤어졌다. 각자 바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J 교수님이 엄청 화가 나셨다는 것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교수님은 술을 좋아하셨고 테니스 시합을 마치면 당연히 학생들이 술자리를 만들어 교수님께 감사의 표시를 할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교수님이 만들어 주신 트로피만 챙겨서 집으로 돌아간 학생들에게 꽤 섭섭함을 느끼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의 마음이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그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성경에 1만 달란트를 빚 진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종이 1만 달란트를 빚졌으나 주인은 그의 사정을 듣고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 1 달란트는 그 당시 노동자의 15년 치 품삯에 해당한다고 하니 연봉을 2,000만 원으로 가정해도 현재의 금액으로 3조 원에 해당하는 말도 안 되게 엄청난 금액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난다. 그는 친구의 멱살을 잡으며 빚진 돈을 갚으라고 한다. 1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성경에 왜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나쁜 사람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우연히 마주한 이 성경 구절에 관한 글이 나를 심하게 내리쳤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창조주에게 1만 달란트를 빚 진자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가 받는 섭섭함이나 상처는 그에 비하면 100 데나리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1만 달란트 빚진 자이다!


생명을 거저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서른한 살에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잠자고, 배우고, 즐기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남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멱살을 심하게 잡았던 몇 사람이 떠오른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스크린 캡처한 e-보딩패스로는 탑승할 수 없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던 비행기 승무원, 집안 사정으로 내 돈을 떼어먹은 여행사 직원, 취중에 나에게 반말로 대들었던 후배 교수,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아서 같은 질문을 다섯 번 이상 하게 했던 어떤 모임의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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