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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할 말 많다구!!

내가 대학원 과정에 있을 때 유명 대학 교수였고 언론에도 자주 등장했던 스타 선배가 우리 학과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약 2시간이 넘는 식사 시간 동안 거의 선배 혼자만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시계를 보더니 '다들 얘기 다 했나? 이제 그만 일어나지!'라고 했다. 나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10명 정도의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는 것이 많아서 말이 많을 수도 있다. 내가 조교수 시절 대학 10년 선배였던 P 교수가 그랬다. P 교수는 후배 교수들 5명에게 저녁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저녁 6시에 만나서 거의 11시까지 같은 자리에서 그 선배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것도 방바닥에 앉아서! 그의 말은 빠르지 않았지만 화제 전환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말 도중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그의 어마어마한 카리스마에 눌려서 감히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간혹 다른 사람이 말을 해도 그는 '그건 말이야 사실은...' 와 같이 그 말을 받아서 자신의 이야기로 이어 나갔다.     


나의 아버지는 위의 두 분과 같이 타고난 이야기꾼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머리에 가득 담고 다니셨다. 같은 이야기를 자주 반복하셔서 내가 어쩌다 '아버지, 그 말씀은 여러 번 하셨는데요?'라고 말씀드리면 '우리 동창들은 몇 번을 같은 말을 해도 잘 듣는데 너는 태도가 안 됐다!'라며 삐지셨다. 팔순 잔치 인사말을 하실 때는 미리 적으신 원고를 40분(4분이 아니고 40분이 맞음!) 동안이나 읽으셨다. 축하객들은 식사도 못 하고 벌을 섰지만 그 인사말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야기꾼 선배들과 나의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후배나 학생들에게 내 이야기는 되도록 적게 하고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하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그런 이유로 강의실에서도 되도록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준다. 그래도 여전히 강의 시간에 선뜻 나서서 말하는 학생들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소주를 곁들여 함께 고기를 먹을 때는 다르다. 예전과 달리 교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들만의 관심사를 이야기한다. 한참 듣다 보면 내가 투명 인간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도 나이가 들어보니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이 생겼다하지만 이야기꾼 선배들처럼 될 것 같아 목까지 올라오는 내 말은 되도록 삼킨다그들의 말을 듣고 질문에 대한 답만 짧게 하려고 노력한다그래도 말을 참는 것은 재채기를 참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한 달 전쯤 우연히 음성 파일을 텍스트로 만들어주는 스마트폰 앱을 알게 되었다. 회의 시간에 이 앱을 사용하면 회의 내용을 모두 녹음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한 사람들을 구별해서 말한 내용을 글로 적어준다. 회의 내용을 요약해 주고 키워드도 여러 개 뽑아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능은 전체 회의 중 각 사람이 말한 시간이 몇 % 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 회의나 모임이 있으면 그 앱을 사용해 보았다. 물론 사전 동의를 받고 말이다. 그 시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중에 글로 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3일 전 일요일, 독서 모임을 같이 하는 제자들 3명과 한적한 학교 야외 카페에서 멕시코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스마트폰 앱을 켜 두었다. 두 명의 재학생 중 취업을 앞둔 4학년 학생은 대기업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 질문을 집중적으로 했다. 그 졸업생은 도움이 될만한 꿀팁을 아낌없이 쏟아 내었다. 나는 대화에 소외되지 않도록 2학년 학생이 관심 가질 만한 주제를 여러 번 질문하였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 그 앱이 만들어준 노트를 보았다. 내가 가장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뭐? 이건 말도 안 돼! 난 주로 제자들에게 말을 시켰잖아!!'라고 생각하며 대화 내용을 쭉 훑어보았다. 내 입에서 탈출에 성공한 말들이 글자가 되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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