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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하지 않는 여행

아내와 청송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오전 10시쯤 출발하기로 했기 때문에 짐을 전날에 챙길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작은 가방에 내 짐을 챙겼다. 여행을 위해 만들어 놓은 체크리스트 파일을 컴퓨터에서 열어서 확인해 보기도 했다. 아내가 준비할 때까지 기다린 후 10시쯤 출발했다.

경부 고속도로에 올라 만남의 광장을 지날 때쯤 빠트린 것이 생각났다. 아~ 노트북 컴퓨터!(나중에 여행 체크리스트를 다시 보니 ‘노트북 컴퓨터’는 굵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는 하루도 컴퓨터 없이는 지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렇게 지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여행 중에도 일기를 쓰고 이메일 회신을 하고 사진을 보정하기도 해서 컴퓨터는 필수이다. 그렇다고 집으로 다시 갈 정도로 아내 앞에서 유난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하고 애써 씩씩하게 말한다.     


“컴퓨터가 없으면 스트레스받지 않고 더 좋~~지요!”

“필요하면 숙소에 있는 컴퓨터 좀 쓰지 뭐!”     


숙소에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노트북을 빠트린 덕분에 여행 중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목적 없이 인터넷을 뒤져보는 시간이 사라졌다. 챙겨간 책을 거의 다 읽었고 일기는 만년필로 적었다. 손 글씨로 일기를 쓴 것은 아마도 중학교 졸업 이후에 처음인 것 같았다.     


우리가 묶었던 룸에는 옷장이 없었다. 아내와 나의 옷을 의자나 침대 위 등 이리저리 늘어놓으며 지내야 했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룸 전체에 우렁차게 들렸다. 아내와 내가 새벽에 번갈아 가며 깰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여행을 떠나면 일정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집을 떠나면 아내는 먹고 자는 것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 쇼핑에도 관심이 있는데 다행히 이번 여행지에는 사과 이외에는 살 만한 것이 없었다. 첫날은 여행지로 이동하는 것 이외에 웬만하면 다른 일정을 잡지 않는다. 그다음 날부터의 일정은 하루에 한 개만. 아침 식사를 일찍 하고 여유 있게 출발하여 한 곳을 둘러보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점심 식사를 마친다.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 아내와 둘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와 멍 때리기를 반복한다.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쉰 후에 이른 저녁을 먹고 방에서 각자 쉬었다가 잠자리에 든다. 여행은 주로 평일에 다니고 남들보다 일찍 움직이는 덕분에 가는 곳마다 한산함을 즐긴다.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내는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배경이 좋더라도 내가 아내를 향해 카메라를 들어 올리면 웃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표정이 달라진다. 남들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하고 있을 때는 충전하는 것인가? 아내는 활발한 성격이지만 연애 시절에도 나하고 둘만 있으면 말이 없었다. 유일한 모델인 아내를 자주 찍을 수 없으니 좋은 경치가 나타나도 카메라 대신 눈에 담으려고 애쓴다.     


청송에서 차로 40분 운전해서 영덕에 갔지만 영덕 대게는 먹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만든 10만 원짜리 정식 이외에는 대게를 간단하게 맛볼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우연히 물가자미 맛집에 들렸고 그곳에서 가자미의 종류는 20가지가 넘는다는 것도 알았다. 여행사 광고에서 물이 좋다고 했던 솔기 온천도 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 숙소의 온천에서 오후 3시에 나 혼자만의 노천탕을 즐긴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인스타에도 페북에도 여행 중 찍은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남들이 관심을 둘 만한 것들을 따라 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노트북을 챙기지 않아서 다른 것들이 보였듯이!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집만큼 편한 곳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여행 중 느꼈던 불편함을 통해 일상에 대한 감사가 느껴졌고 없어도 될 물건과 일들이 보였다.     


나이 들어 아내와 둘만 가는 여행에서 가슴 뛰는 재미를 찾기는 어렵다. 그래도 즐겁다. 영덕 해맞이 공원 근처의 카페에서 통유리 창밖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이 짜릿하게 기억난다.




* 사진 : 청송 덕천마을에 위치한 송소고택. 조선시대 99칸으로 이어진 만석꾼의 집으로 188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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