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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을 1년 앞둔 왕고

방학이 끝날 무렵 대학에서는 전체교수회의를 소집한다. 한 주 뒤에 시작될 새 학기를 준비하는 의미도 있고 이 자리에서 신임 교수와 정년 퇴임 교수를 소개하기도 한다. 신임 교수와 정년퇴임 교수 간에는 대략 30년 정도의 세월이 있다. 나는 95년도 2월 말에 있었던 전체교수회의에서 신임 교수로 단상에 올라섰다. 이제 내년이면 정년 퇴임 교수로 같은 자리에 오르게 된다. 나의 신임 교수 임명장에는 퇴임 날짜가 2025년 2월 28일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임명장을 건네주던 총장님은 '박 교수는 내가 저세상에 간 후에도 교수를 하겠네?'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분은 아직도 건강하게 지내신다.


내가 조교수 시절에 정년퇴임을 앞둔 교수님 중에는 허리가 약간 굽어진 분, 식사 중에 음식을 흘리는 분, 걸음이 불편한 분, 젊은 교수들의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불평하던 분들이 계셨다. 정년을 1년 후에 정년을 맞이할 나는 푸시업 30개는 여유 있게 할 정도로 건강하다. 고등학교 동창이며 모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 교수는 최근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두 번째 다녀왔다.      


지난 2월 말에 있었던 전체교수회의에서 우리 학과의 이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맞이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학과 11명의 교수 중 ‘왕고’가 되었다. 내가 왕고(왕고참의 준말)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나의 형이 군대에서 제대할 무렵 휴가를 나왔을 때다. 형은 왕고가 되어서 군대 생활이 편해졌다고 했다. 선임이 없고 후임만 있으니 그야말로 내무반에서 왕 노릇을 하며 지낸다는 뜻이었다.     


내가 신임 교수로 임명될 때 학과에는 나보다 한 살 위 교수님이 있어서 나는 왕고를 1년밖에 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내가 은퇴한 후 왕고가 되는 임 교수는 18년 동안이나 왕고를 할 예정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신임 교수를 초빙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퇴임 후 학과에서 유일한 정교수가 될 그는 왕고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그보다 후임 교수들은 현재 대부분 조교수, 부교수이기 때문에 승진하기 위해서는 임 교수의 평가를 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의 왕고는 후임자들에게 라면을 끓여 오라고 하거나 천 원짜리 한 장을 주며 내무반 식구들과 나눠 먹을 과자, 음료수 등을 사 오라고 하며 잔돈은 꼭 챙겨 오라고 했단다. 내가 조교수 시절 우리 학과의 왕고 교수님은 젊은 교수들에게 엄한 아버지 같았다. 가끔은 술자리에서 편안한 말투로 교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또 다른 왕고 교수님은 퇴임 후 2년 동안이나 자신의 연구실을 비우지 않았다.
 
물론 요즘 그런 것은 꿈도 못 꾼다. 우리 학과에는 나의 아들보다 어린 교수도 있지만 나는 그를 '최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에게 라면을 끓여 오라고 시키지도 않는다. 가끔 예전의 교수님들이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학과의 왕고로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 학과에서는 수업 시간표를 작성할 때 왕고 교수가 우선권이 있다. 왕고인 내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시간표에 내 수업 시간을 적어 넣으면 그다음 교수들이 시간표를 순서대로 작성한다. 지난 12월에 빈칸만 있는 시간표를 받아 들었던 느낌은 5성급 호텔 뷔페식당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음식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정년퇴임 1년 남은 교수를 배려해서 책임 수업 시간을 1년 18시간에서 9시간으로 줄여준다. 아마도 학교는 멀리하고 사회에 적응하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매일 출근한다. 게다가 학교에 오래 있다 보니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경우가 잦아졌다.

     

왕고가 되어 교수 생활을 뒤 돌아보다가 박사과정 첫 학기 때 들었던 학과장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분은 교수의 즐거움을 세 가지로 요약하셨다. 20대 초반의 대학원생들을 가르치는 기쁨,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기쁨, 대학 내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는 기쁨이다. 처음 두 가지는 어느 정도 누리며 산 것 같은데 세 번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 눈앞의 것들만 챙기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왕고로 지내게 될 앞으로 1년 동안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려고 한다. 나와 가까이 지냈던 교수들과 교직원 선생님들에게 돌아가며 학교 근처 맛집에서 점심을 대접하자.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소리 내어 인사하고 가끔은 손도 내밀어 보자. 50% 이상의 정년 교수들이 귀찮다고 참석하지 않는 마지막 전체교수회의에 당당히 참석하자. 후배 교수들이 기억할 만한 짧고도 임팩트 있는 말을 미리 준비하자.
 
 아니 그냥 아무 말 없이 푸시업 30개를 빠르게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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