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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신익 Jun 11. 2023

[영화 후기/리뷰/정보]<카일리 블루스>

파편화된 기억과 시간을 잇는 실험의 장

감독 : 비간

개봉 : 2023년 5월 24일


  4년 전 개봉한 <지구 최후의 밤>을 관람한 순간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조조로 영화를 관람했고 덕분에 집중하기가 참 힘들었는데요, 가뜩이나 영화에 명확한 서사가 없고 시간 순서를 거스르며 진행되는 비선형적 서사의 영화인데다 이미지 위주의 작품이다보니 더더욱 고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 이 영화가 이러한 이미지들을 왜 제시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순간 주는 감흥이 굉장히 뛰어난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같은 영화를 한 번 더 관람했던 기억이 있는 영화에요. 국내 개봉 순서는 반대가 됐지만 <카일리 블루스>는 비간 감독이 <지구 최후의 밤>를 만들기 전에 연출한 작품이고 이 사실만으로도 <카일리 블루스>를 기대하게 됐습니다.

  <카일리 블루스>도 사실 비슷했습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극장에 갔고 똑같이 집중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사실 조금 졸았더라도 영화가 주는 정보, 그러니까 서사를 논리적으로 조립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지구 최후의 밤>과 마찬가지로 비선형적인 서사에 이미지 중심의 전개에 주인공이 버려진 조카를 찾는다는 내용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서사가 없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진짜로 졸았다면 영화가 주는 경험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 최후의 밤>의 근간을 이 영화에서 대부분 찾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카일리 블루스>가 선사하는 영화적인 경험은 상당히 뛰어납니다.

  <카일리 블루스>와 <지구 최후의 밤> 두 작품으로 미루어볼 때 비간 감독은 일어난 사건 등 명확한 정보를 오히려 불분명하게 그려내고 꿈이나 기억 등 불명확한 정보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기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일리 블루스>도 조카와 함께한 순간들이나 자신에 관한 정보(직업, 거취 등등)를 다루는 초반부에서는 시간의 순서를 이리저리 뒤섞어 놓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경험하는 것,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불분명한 후반부에서는 장장 40분짜리 원 테이크로 가장 사실적인 경험을 선사하죠. 이러한 기조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사실과 허상이 갖는 특징(정보와 불분명성) 때문에 놓치기 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이미지는 영화의 감정을 극대화합니다. <카일리 블루스> 역시 초중반부의 정보들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생기는 주인공의 고독감, 그로 인해 생기는 조카에 대한 애정을 극대화하고 후반부의 기이한 경험의 근간을 뒷받침합니다. 실재하는 대상(조카)을 찾는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실상 찾는 건 잠시나마 행복했던 기억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기조가 갖는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영화는 마치 파편화된 기억과 시간을 더듬어 보는 일종의 실험장이라고 느껴졌고 이 실험이 <지구 최후의 밤>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서순을 정상적으로 하여 <지구 최후의 밤>이 공개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았다면 그 감흥이 더 상당했을 것 같은데요, 전달력이나 기술적(특히 롱테이크 부분에서)인 한계가 일부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지구 최후의 밤>이 어떻게 탄생된 영화인지, 그렇게 비간 감독이 탐구하고 싶었던 테마는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고 그것들이 선사하는 경험이 상당히 영화적이고 좋았습니다.

+영화의 시청각적인 경험만을 보러 간다 생각해도 상당히 좋은 영화입니다. 음악의 활용이 상당히 뛰어나고 촬영이나 미장센 역시 마치 꿈속을 떠다니듯 몽환적인 영화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색감과 질감이 충돌하는 초반부와 장장 40분에 달하는 롱테이크로 이뤄진 후반부는 각각의 매력이 확실한 편입니다. 물론 후반부 롱테이크는 앞서 언급한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일부 어색한 흐름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내용을 배제하고 영상 그 자체로도 가치가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연출적인 것도 그렇지만 프로덕션 측면에서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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