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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타운걸 Feb 10. 2021

뉴욕에서 혼자 살기

이사, 나만의 부엌

미국에 와서 처음부터 나만의 부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첫 삼 년은 학교 기숙사 2-3인실에서 지냈다. 그 시기에 나는 항상 수업을 세 개씩 듣고 일도 하고 있었으므로 요리는 여전히 생존의 영역이었다. 주중에는 매일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후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외식이 잦았고, 집에서도 늘 먹던 것들을 차려 먹었다.


3년차를 마치고 나는 이사를 하기로 했다. 예상은 했지만 외국인 유학생 신분으로 엄청난 보증금 또는 법적 보증인 없이 혼자 살 괜찮은 집을 구하는 데는 제약이 많았다. 무엇보다 기숙사 방 한 칸 월세보다 조금 높은 내 예산에 맞는 1인용 스튜디오는 맨하탄을 통틀어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어쩌다 예산에 맞는 집이 나와서 보러 가면 나는 크게 실망하고 돌아왔다. 위험해 보이거나 무언가 - 이를 테면 부엌이라든가 창문 혹은 둘 다- 가 없다거나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집들이었다. 내 예산의 상한선은 내가 봐도 터무니 없이 낮았고, 집을 알아보면 알아 볼수록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기숙사에는 이미 이사를 나갈 날짜를 말해두었고 짐도 벌써 잔뜩 싸두었는데 막상 내게는 갈 곳이 없었다. 낮에는 이리 저리 집을 보러 다니고, 저녁이면 주눅이 든 채 기숙사로 돌아와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남은 짐을 쌌다.


어느 날 기숙사 근처에 나온 집을 보러 갔다. 익숙한 동네였고 필요한 것도 대충 갖춰져 있었다. 월세도 기숙사 다인실보다는 비싸지만 1인실보다 싸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부족한 게 있으면 그 때는 내가 감당하고 살아야지. 이만한 집이 없을 거란 생각에 그날 바로 예약금을 걸고, 이틀 후 계약을 했다. 기숙사 계약이 끝나기 이주 전이었다.


그 해 7월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나는 책꽂이 두 개와 책 몇 박스, 옷가지와 매트리스를 들고 기숙사를 나왔다. 가방 두개를 들고 미국에 처음 왔는데 어느 새 짐이 많이 늘어 있었다. 이삿짐 트럭 조수석에 앉아서 새 집으로 가는 기분이 묘했다. 집을 알아보는 과정이 지난하고 힘들었던 데 반해, 이사는 삼십분 만에 싱겁게 끝나버렸다.


큰 대로와 일방통행 길이 만나는 귀퉁이, 지은 지 백 년은 된 사 층짜리 낡은 건물. 회색칠을 한 벽돌 외벽에 철제 비상계단이 달린 이 건물 이층의 작은 아파트가 내 집이 되었다. 불필요하게 큰 오븐과 냉장고, 두 칸짜리 상부장이랑 하부장이 달린 부엌과 작은 화장실, 그리고 방이 딸린 이 작은 스튜디오에서 나는 그 이후로 줄곧 살았다.

처음으로 나만의 부엌이 생긴 순간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 때 내가 가진 부엌 살림이라곤 수저, 컵, 냄비 하나, 후라이팬 하나, 공기 몇 개가 전부였다. 룸메이트들과 살림을 나눠 쓰다가 독립을 하니 자질구레하게 사야 할 세간살이가 많았는데, 마침 그 무렵 한국에 들어가게 된 다른 유학생에게서 접시며 조리도구 몇 가지와 칠 벗겨진 낡은 접이식 식탁을 헐값에 샀다.


벌써 몇 명의 유학생 손을 거친 것이 분명한 물건들. 짝도 맞지 않고 개성이라는 것도, 취향이라는 것도 없는 물건들. 불편하지 않을 정도, 딱 그만큼의 구색만 갖춘 어느 뜨내기의 살림. 그렇게 내 첫 부엌이 만들어졌다. 그 때 내가 먹는 것들은 내 살림살이의 모양새와 어딘지 닮은 데가 있었다.


이사를 하고서 이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혼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무 때나 내가 먹고 싶을 때, 냄새나 소음 걱정 없이 뚝딱뚝딱 부엌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외식이 잦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라면을 끓였으며 시간이 되는 대로 익숙한 음식을 해 먹으며 지냈다.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오면 쉬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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