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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까치 Oct 10. 2020

책상에 앉기가 힘들어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외 1권 - 무라카미 하루키

○ 증상
     - 열심히 하려는 마음은 있는데, 늘 시간을 허투로 보내고 후회해요.
     - 무언가 꾸준히 하는 것이 어렵고, 작심삼일로 끝나기가 일쑤예요.
     - 매번 계획만 짜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려워요.

○ 처방 책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변태 하루키?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말해 뭐하겠어요. 그의 작품에 푹 빠져 본 사람은 예외 없이 그를 좋아하죠. 하지만 그의 작품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뭐가 훌륭한 글인지 못 알아 먹는 싸구려 독서력 탓에 제게는 작품성으로 순위를 매길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위인으로서의 거창한 무엇보다, 현실적인 생활습관이 제 마음을 더 울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활을 엿보면, 언뜻 고통을 즐기는 사람(변태?) 같습니다. 하루키는 매일 하루 다섯 시간씩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마라톤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실제로 뜁니다. 일 년에 몇 번씩이나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를 지금의 ‘하루키’로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작가로서의 재능이 큰 역할을 했겠습니다만, 그의 결벽에 가까운 자제력(변태성?!)만으로도 그는 이미 범인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하는 생활패턴을 당연한 삶의 일부로 소화해냅니다. 남들에게 힘겨운 인내인 것이 하루키에게는 평범한 일상인 것이지요.


하루키는 어떻게 그렇게 절제에 능할까요. 고통을 못느끼는 것일까요, 인내심을 단련해온 덕인 걸까요? 아니면 정말 변태인걸까요? 그 단서는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왠지 힘 빠지는 결론입니다. 그는 하루 다섯 시간씩 집필하기를 매일 반복했다고 했습니다. 마치 마라톤을 하듯 말입니다. 그런데도 한 번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니요. 그러고 보니 그가 마라톤을 즐기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지옥과 같을 수 있는 꾸준한 반복이 그에게는 희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은 쿨하게 잊는다


그가 그렇게 절제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에게 있어 마라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루키는 그의 또 다른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마라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서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마라톤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단서를 알려줍니다. 마라톤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온 몸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갈 때쯤에는 화가 나지만, 완주하고 나면 고통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을 기약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마라톤에서 느끼는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 집필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제야 그가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는 하루키의 말은 거짓입니다. 다만 의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고통의 기준이란 게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이를테면, 하루키는 집필하는 동안 고통을 느꼈지만, 집필을 마치고 고통을 잊은 후에는 '고통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하루키에게는 그 어떤 고통도 없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란 꼭 아픈 것만은 아닙니다. 그 존재의 의미가 부여될 때는 반대로 자랑스런 훈장이 됩니다. 이제 앞으로 해야할 것이 너무나 또렷하게 존재하는데, 이미 다 지나가버린 과거의 감정에 집중할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하루키가 말하는 ‘결의를 다진다’라는 것 역시 미래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집필활동이든 마라톤이든 그것이 끝이 나버린 상황에 오로지 미래를 생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는 것이지요.     



긍정의 믿음으로


단언컨대, 분명히 하루키 역시 고통을 느낍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증(analgesia)’이 아니라, 고통을 쉽게 잊어 버렸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이 강조하는 ‘긍정의 힘’입니다.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결실을 맺는 일이 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긍정으로써 해야할 것을 해내가는 것, 지금의 하루키를 만든 것은 바로 그 것입니다. 긍정적 자기규율은 개인의 정신세계를 확장시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이지요.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가치관에 근거한 규율을 지켜낼 때, 꿈꾸는 인간상에 가까워짐을 느끼며 높은 자존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그것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리고 그런 활동으로 다시 자신감을 얻게되는 무한 선순환의 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이 루빈 교수가 하루키를 ‘절제와 집중’으로 표현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겠지요. 하루키는 절제로써 고양된 자신감으로 집중해내는 긍정의 궤도에 아주 안정적으로 오른 사람입니다. 그 궤도란 아주 격정적이지만 고요한, 치열하지만 평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과거가 되어버린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긍정뿐일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이것만 생각하면 되겠군요. 지금 당장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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