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가득히 찬 미친 범죄자 남녀의 기괴한 사랑 이야기 뮤지컬
(출처: Next Best Picture)
2019년에 개봉했던 "조커"는 그전까지 그 누구도 쉽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히스 레저"가 만들고 그 배역에 몰입했던 부작용으로 죽음까지 이르게 만든 찐 광기의 "조커"를 "호아킨 피닉스"가 마치 한 수 가르쳐 주고, 살아남기까지 하겠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듯한 그 년도 최고작이었다.
2024년에 2편이 만들어질 거라곤 사실 예상하지 못했고, 당시의 인터뷰 등을 복기해 보면 "토드 필립스 감독"이 2부를 만들어야 할 필연을 지니고 있지 못했던 인상이 떠오른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베니스 영화제, 영국 아카데미 등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확대 재생산하듯 반복 수상했다.
한때 아역 배우 시절 자신보디 더 빼어난 미모를 지닌 형인 "리버 피닉스"가 스포트 라이트를 받다가 그만 요절한 이후 그제야 서서히 자기 존재감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호아킨 피닉스"는 수많은 악역에서 존재감을 도드라지게 보여줬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깊이와 너비가 남다른 "조커"가 됐다.
그때 그 존재감을 잊을 수 없는 관객이 어제 첫 개봉일에 주로 커플로 구성되어 영화관을 거의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통신사 무료 할인 기회를 살려 두 다릴 쭉 펴고 영화를 볼 수 있는 리클라이너관으로 들어가면서 제로 스프라이트와 떡볶이를 사들고 들어간 나는 그만 셔츠에 빨간 국물을 묻혔다.
그것이 불길한 복선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시작과 동시에 1980년대에 주한미군을 주 대상으로 방송되었던 채널인 "AFKN"에서 아침마다 나왔던 워너브로스의 만화에서 나온 그림체로 그림자와 실체로 분리되어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 말을 하던 “이중적 자아로 분리된 조커”가 토크쇼에 출연하여 난동을 피우다 잡힌 내용이 일사천리로 알아보기 쉽게 나왔다.
그런데 잠깐. 1편의 결말의 매력은 "조커"가 자신의 연쇄적인 살인행위로 인해 결국에는 붙잡혔는가 아니면 도시를 폭동으로 물들이던 그의 지지자들이 모두 "조커"와 같은 분장을 하고 그를 탈출시켜 자신의 우두머리로 삼으려고 호송 중인 차에 부딪치는 사고도 일으킨 장면이 나왔기에 종잡을 수 없는 상태의 "조커"의 후일담이 궁금해진 것이었는데, 2편은 이 2가지의 길 중에 "조커"의 감옥행을 택했다.
숨죽이고 보게 될 만큼 도입부는 1960년대 수준의 비위생적이고 간수들이 무지막지하게 죄수를 대하는 거칠고도 잔혹한 감옥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연쇄 살인범으로서 간수들의 놀잇감처럼 부려 먹히고 두드려 맞는 "조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를 "아서 플렉"으로 부르고, "조커"라는 존재의 무서운 살기 같은 것을 애써 무시하며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지우려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인류에 대한 애정을 지닌 선의의 소유자인 "아서 플렉"의 여자변호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서 플렉"이 자신의 학대받고 빈곤한 어린 시절에 의해서 인격이 2개로 만들어져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인격인 "조커"가 나타나서 살인을 한 것이란 논리로 그의 생명을 구하려 한다.
"하비 덴트"는 정의의 검사이자 오만함에 찌든 태도를 지닌 이로서 법정에서 "아서"에게 사형을 내리게끔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며 나타나는데, 그전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시리즈에서 "투페이스화"하는 설정의 인물과는 전혀 다른 가벼운 존재감만을 보여줬다.
이 변호사와 검사 간의 법정 공방 중에 "아서"는 자신이 다름 아닌 "조커" 자체라는 이야기를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하고 싶어 하고,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지만 "레이디 가가"가 연기한 "리"로 불리는 "할리퀸"으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도 그 같은 범죄에 공감하며, 열렬히 "조커"를 사랑한다는 표현과 함께 구애해 오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부제인 "폴리 아 되"는 불어로 “공유정신병”을 뜻하는 것인데, 같은 망상이나 정신병적인 증상을 같은 양상으로 갖고 있는 둘 이상의 복수의 인간이 서로 간에 망상 등을 공유하며 깊게 결합감을 가진 상태가 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 존속인 어머니를 "조커"가 죽인 것을 "할리퀸"은 이해하고 자신도 집에 불을 질러봐서 안다고 공감해 오는 장면의 섬뜩함이 강렬하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이전에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퀸"이 출연한 뒤에 그만 빼놓고 출연한 나머지 배우 거의 대부분이 해당 극화에서 용도폐기된 망작에서 이 공유정신병으로 똘똘 뭉친 "조커"와 "할리퀸"의 사랑은 솔직히 잘 납득이 안 됐고, 사춘기 망상을 지나치게 극단화한 것 같은 조악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이 황당한 정신과 질환의 두 명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을 "뮤지컬"로 장르를 변환시켜 서로가 부르는 노래와 춤, 공연 형태의 환상으로 보여준다.
그같이 서로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공유하는 둘의 모습을 형상화해 내기 위해 배우와 감독, 스태프 모두의 역량이 아낌없이 부어졌다.
최소한 이 뮤지컬 장면들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바르지 않았다 같은 이야길 할 순 없다. 너무 잘 만들어졌고 재능의 향연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가 기대보다 더 일찍 왔던 것 같았다.
이 뮤지컬 부분을 제한다면 망작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그려진 "조커"와 "할리퀸"의 로맨스와 비교해서 더 나은 양상으로 그려질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일 정도다.
이렇게까지 장르를 변환시킬 거라 기대하지 못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꽤 신선했을 것이다.
이 뮤지컬 장면이 없는 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살짝 잠이 올 것 같은 부분이 있었지만 뮤지컬은 극의 신선함을 유지했고 노래에 대한 "레이디 가가"와 못지않게 호흡을 잘 맞춘 "호아킨 피닉스"의 콤비네이션도 수준급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뮤지컬이 망상 장면 자체가 되고 이를 대체하면서 작품의 수준이 더 올라가고 관객의 만족도도 더 올라갔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조커"와 "할리퀸"의 사랑이 점점 더 납득할만한 것이 되고, 자신을 버리고 압박했다는 분노를 폭발시켜 이 사회 속에서 겪은 부당함에 대한 폭력적인 복수가 1편에서 오히려 더 와닿는 부분이었던 적지 않은 관객이 기대한 "조커"의 복수가 제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조커"와 "할리퀸"의 사랑이 제대로 꽃피지도 못한 채로 벌어진 마무리에 있었다.
"할리퀸"과의 사랑 때문에 힘과 자존감을 증폭시키게 되어 자신이란 존재가 "조커" 그 자체라고 법정에서 이야기하며 자신을 "아서"와 "조커"로 분리하여 살리고자 했던 "변호사"를 해고한 뒤에 벌어진 법정 장면에서 "조커"는 실수를 남발하고 "아서"로 살아갈 때 절친이었던 난쟁이 친구가 증인으로 나왔을 때 압박하며, 괴롭히기도 한다. 그 친구는 "아서"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무섭기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관객이 적지 않게 기대했을만한 내용은 "할리퀸"이 지지세력을 끌고 와서 감옥에서 "조커"를 탈출시켜서 거대한 조직을 만들던지, 그게 아니라면 우여곡절의 사건으로 풀려난 "조커"가 법정과 법정 밖에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본질이 "조커" 자체임을 어필하며 우리가 익히 아는 절대악적인 존재로 세상을 어지럽히면서 "배트맨"과 조우하게 될 거란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뻔한 스토리로 만들어가지 않음으로써 토드 감독은 창작가로서의 어쩌면 의무이자 권리인 독창성 있는 창작을 했고, 그 내용은 기대하는 패턴과는 다른 것으로 흘러갔다.
"조커"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그치고, 공유정신병적인 판타지가 사라진 "아서"를 본 "할리퀸"은 그의 아이를 자기가 열렬히 원해서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커"를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나서 급속도로 무력해지면서 매력을 상실한 "아서"를 관객조차 버리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조커"는 이 이후에 어떤 존재가 되고 그를 떠난 "할리퀸"과의 재회는 어떻게 생기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너무도 많이 김이 새는 답변이었고 너무 어이없이 급작스럽게 나왔다.
이후에 또 다른 "조커"가 될만한 광기 어린 자가 "아서"를 죽이는 장면이 거의 아무런 개연성이나 사전의 복선이나 암시 없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1편에 사로잡혔던 동시에 2편의 중간중간 1편의 "조커"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가 만들어져 티브이에서 상영된 이후로 그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올라갔음을 중간중간 설명했던 극 속의 장치가 배신감을 느낄만한 이유로 기억이 되기 시작했다. 그저 관객을 기만하기 위한 장치였으니까.
극 중의 "할리퀸"이 느낀, 공유정신병에서 풀려나며 "조커"가 아닌 "아서"가 되기를 원한 순간부터 관객 역시 극을 보는 동안 살짝 그 같은 정신병을 공유했었던 기억과 느낌이 있었던 것인지 극 속의 "아서"와 더불어 영화 자체를 버리게 되는 것 같았다.
이 공유정신병에 대한 내용과 뮤지컬, 법정 공방을 잘 구현하여 어쩌면 다른 여러 국가에서의 흥행은 꽤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기 이곳, 한국에선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기엔 어려움이 많이 따를 것 같았다. 물론, 평론가나 기타 영화전문가는 장점을 찾아낼 것이다. 실제로 있기도 하고.
그런데 직감과 더불어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해 지루함과 억울함, 답답함을 느끼기 일쑤인 관객이 대부분의 대중을 차지하는 국내 극장가에서 이 작품이 이해받고 1편과 같은 수준의 좋은 흥행을 해낼 것이란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들어와서 글을 쓰는 것은 "공유정신병"까지는 안되더라도 나와 같은 정서나 사고방식을 가진 분에게 경고의 글을 남기기 위해서다. 기대감을 낮추면 볼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호아킨의 원맨쇼같은 마법적이고 흑마술적인 매력은 상실되어 버렸고 이후 후속작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떠올려지지 않는다.
“조커”는 전편에서 그가 저지른 연쇄살인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인데 관객의 감정은 후련함과는 거리가 멀다. 감독이 잔인하게 죽인 것은 이 극화가 가진 모든 방향의 해석의 가능성이다.
여기에서 상징성과 신화 등의 내용을 찾아내는 경지는 대중의 저 건너편에 위치한 먹고 사는 문제와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역에 위치하고 있고 재미없어서 사라지는 곳이다. 그같은 해석은 서정시에 가깝다.
“너희가 게 맛을 알아?”이런 류의 문장에 담겨지는 결론을 보는 관객의 심정을 감독은 어떻게 느끼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