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는 백마탄 왕자
잡초 덤불을 헤치고 고구마를 캔다. 내가 아니고 포클레인이. 포클레인으로 고구마를 캐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매번 새로운 작물을 심을 때면 새 학기를 맞는 학생의 마음이 된다. 수업 끝나면 놓치지 말고 제때 예습, 복습 잘해서 좋은 성적 받아야지. 야물딱진 계획을 세운다. 고구마를 심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한 줄기 한 줄기 정성스레 심으며 다짐했다. ‘밭에 비닐을 씌웠지만 분명 고랑엔 잡초가 많이 날거야. 올해는 보이는 족족 잘 뽑아야지.’
고구마 한 단에 대략 100줄기쯤 된다. 엄마도 드리고 시댁에도 보내 드리고. 친구도 주고 여기저기 나눈다고 두 단이나 샀으니 심어야 할 것만 무려 200 줄기.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심다 보니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교과서 앞부분만 필기가 빼곡하듯 나의 고구마 농사도 시간이 갈수록 게을러졌다. 처음엔 잡초의 연둣빛 연한 새싹만 보여도 달려가서 뽑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너무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모았다가 뽑자.’
삼일 모았다가 뽑았다. 그러다가 삼일이 일주일이 되고, 보름이 넘더니 한 달이 되었다. 밭 관리에 소홀한 사이 어느새 고구마를 심은지 넉 달이 지났다. 캐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고구마 밭은 우리집 아래에 있지만 정확한 상태를 보려면 장화를 신고 안쪽으로 쭉 들어가야 했다. 그것조차 귀찮아서 몇 달을 방치 했던 것이다. 농사에 대한 열정이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가 냉각수처럼 식었다. 농사를 이렇게 짓는 사람이 또 있을까…
고구마 밭은 풀들이 만든 환장의 콜라보였다. 중심을 이루는 원줄기에 손가락처럼 여러 가닥이 붙어서 자라는 고구마줄기. 중심 줄기는 2m가 족히 넘고 나머지도 50cm는 넘게 길다. 그것을 베베 꼬면서 덩굴풀이 크게 자라 있었다. 엄지손가락 두 개 굵기에, 키도 커 나무 같아 보이는 잡초까지 셋이 한 몸이 되어서.
지난날 우리의 나태함을 반성하며 ‘도대체 이 풀을 다 어떻게 걷어내고 고구마를 캐야 하나.’ 고민하던 어느 날. 신랑의 다리가 똑 부러졌다. 박스 분리수거를 하러 가다가 계단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심은 것만 해도 200 개였다. 농사가 잘 됐다면 줄기 하나에 고구마가 대여섯 개씩 달렸을 텐데, 그걸 나 혼자 캘 수는 없는 노릇. 그 힘든 일을 누구에게 부탁할 용기가 우리에겐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구마 캐기를 포기 하기로 했다. 싸울 땐 싸워도 이럴 땐 마음이 잘 맞는 부부다.
그런데 이 소식이 옆 마을 사시는, 내가 ‘형부’ 라고 부르는 이웃분 귀에 들어갔다.
“아까운 고구마를 안 캐면 되냐~. 심은 정성도 있는데. 내가 갈게!”
전화를 끊은 지 30분쯤 지났을까.
“우아아앙~ 아아앙”
저 멀리 우리 밭으로 오는 포클레인이 보였다.
형부가 오셨다. 걸어서 말고 장비를 타고. 형부는 포클레인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다.
‘잡초 덤불은 초록 물결 일렁이는 완만하고 아름다운 언덕.
포클레인은 탐스러운 근육으로 무장한 백마.
형부는 백마탄 왕자.‘
형부가 너무너무 든든하고 멋져보였다. 일대에서 제일 가는 기술자인 형부는 손으로 캐는 것 보다도 상처 없이 고구마를 캐셨다. 심지어 캔 것을 포클레인 바가지로 살살 흔들어 흙까지 탈탈 털어 주셨다. 내가 한 일은 낼름 가서 바가지에 있는 고구마를 주워 온 것. 신랑이 한 일은 목발을 짚고 그 모습을 지켜 본 것.
날로 먹었다. 고구마 밭을 잡초 밭으로 만들고, 심지어 고구마 수학도 포기 했으면서… 삽질 한 번 하지 않고 튼실한 고구마를 몇 상자나 얻게 되었다.
튼튼한 박스에 고구마를 담아 형부에게 드렸다. 한사코 받지 않으시길래 “언니 드리는 거예요!” 라고 했다.
그 어느 해에 캔 고구마 보다 자주빛, 빛깔도 좋고 유난히 잘 생긴 것 같다.
‘아이, 탐스럽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