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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Jun 26. 2023

충남의 강호, 전국대회를 누비다

서산개척단과 '넝마주이' 축구단(6)

서산개척단에는 놀랍게도 축구단이 있었다. 위에서 강제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수용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했다. 


"농지를 가꾸면서도 이들은 아주 작은 희망을 품었다. 바로 축구였다. 그나마 여럿이 모여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다 떨어진 공 하나를 우르르 모여 차는 일뿐이었다. 고된 노동 후에도 공을 차는 시간 만큼은 힘든 줄 몰랐다. 그렇게 수용자들은 축구에 대한 열망 하나 만으로 농지를 메우면서도 작은 운동장 하나를 만들었다."



http://www.sports-g.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


수용자들은 고된 노동 후 축구를 하면서, 축구 응원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결국 이들은 민정식 단장에게 축구단 결성을 요청했다.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도 축구를 좋아했다. 박스컵 대회도 만들었을 정도이니.


그렇게 만들어진 '대한청소년개척단 축구단'은 충남 지역 최약체로 꼽혔지만 조금씩 실력이 늘었다. 1965년에는 충남 대표로 전국 체전에 참여했고 도대표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원정하러 온 상대 축구단이 텐트촌 안에서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판잣집 한 채 제대로 지어주지 않은 게 놀랍다.) 몇 년 만에 축구단은 인지면 대표팀으로 군내 경기를 책임지는 등 충남의 강호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언론은 이들에게 '넝마주이 축구단'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그들이 지원도 거의 없이 충남을 제패한 저력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스스로 하고 싶어서 만든 축구팀이라서가 아닐까. 


서산개척단의 축구팀이 인지면과 충남을 대표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다. 서산에서 축구팀의 존재가 지역 대표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지 청년들로 구성된 서산개척단이 축구를 매개로 지역사회에 통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1966년 개척단이 해체되면서 정부 지원도 중단되었고 축구단도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피해 증언에 따르면 개척단이 해체된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민주화’(개척단원들 집단 반발)가 일어났어요. 제가 주동잡니다. 둑 작업할 때예요. 제가 소대장급들 모아서 이야기했어요. “이 중에 배신자 생기면 나는 죽게 될 얘길 할게.” 친구들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조회시간에 제가 단본부 앞에서 “우리를 차라리 죽이든지, 아니면 자유를 주든지 하라”고 했더니 끌고 가려는 거예요.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와 일어났죠. 1천 명이 넘으니까 간부들이 겁을 먹고 도망갔어요. 구호대도 없어졌고요."


https://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6420.html



피해자들이 스스로 '민주화'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이 가슴에 남는다.


누구나 알지만 축구는 조직적인 스포츠다. 한 골을 넣기 위해서 운동장에서 11명이 서로 소통하고, 벤치에서는 감독이 지시하고 관중석의 서포터즈들은 12번째 선수로서 몸과 마음을 바쳐 응원한다. 팀과 서포터즈가 똘똘 뭉쳐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그러면서 모두의 감정이 거대한 물결처럼 뭉친다.


그렇기에 축구장은 유난히 감정이 넘친다. 일체감도 증오도 신명도 기쁨도 지나칠 정도로 넘쳐 흐른다. 그래서 축구는 유달리 감정적인 스포츠다. 축구장에서 선수들은 가끔 울기도 한다. 야구장에서는 그런 일이 극히 드물다.


지금 서산개척단 축구단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 궁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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