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와 탑골공원
동묘에 다녀왔습니다. 말로만 듣던 장소인데 동관왕묘의 줄임말이죠. 요새 동묘 고물상가가 인스타에서 핫한 모양입니다.
어릴 적 가던 청계천 서점이 생각나더군요. 원래 서점은 저런 모습이긴 하죠. 도서관에서 처분한 책들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제가 쓴 책도 언젠가 저렇게 되리라는 생각에 비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찍은 위치는 2층 쌀국수집. (양도 많고 맛있고 한산했어요)
새 물건과 헌 물건이 뒤섞여 팔리는 곳이라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버린 물건과 동대문 시장에서 주인 못 찾고 나이만 먹은 물건들이 섞여 있어요. 사진은 못 찍었는데 오래된 디지털카메라가 가득 쌓인 모습도 봤습니다. 디카 하나 들고 모임에 가면 인기 짱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죠. (연식 자랑중)
관우의 모습. 안에 들어서기만 해도 복닥대는 시장 소리가 멀어집니다. 사진을 잘 못 찍었어요.
관우는 중국에서 돈의 신으로 모셔집니다. 시장 상인들이 좋아할 법하지요. 풍수에 얽힌 이야기 중 하나인데, 동관왕묘 앞에 시장이 생길 거라는 예언이 있었답니다. 시장에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이 군사들이 잔뜩 보인 진과 비슷하다나요. 그 이야기를 미루어 보면 동묘에 원래 시장이 있었던 건 아닌가봐요. 중국 사람도 왔다 갔는지 채소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미신 같지만, 관우 정도의 위대한 영혼이라면 신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깨진 그릇, 낡은 그릇, 비싸고 예쁜 그릇들이 마구 뒤섞인 가운데. 어딘가의 커피전문점을 장식했을법한 랜턴입니다.
퀸 커피 샵이라는 건물 이름과 '히피히피'라는 범상치 않은 명패. 어떤 곳인지 과감히 방문하는 용기는 아직 없어요.
동묘를 둘러보고 나서 돌아온 동대문 DDP입니다. 푸바오일까요?
사진 찍기 좋은 곳이죠. 저는 유행을 늦게 타는 편인데 푸바오가 중국에 가고 나서야 이 판다가 엄청난 미판다라는 걸 알게 됐어요.
동대문은 언제나 서울의 주요 생산기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생산되는 물건들이 모두 팔릴 수는 없지요. 생산되는 물건들은 버려지고 팔린 물건들도 결국 버려집니다. 동묘는 그런 물건들이 모여드는 곳이지요. 동대문이라는 과잉생산, 과잉소비의 화려한 기지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바로 동묘인 것이지요. 어쨌거나 부는 동대문에 집중됩니다. 동묘는 부스러기만 주워 모으는 곳이고요. 그렇기에 관우라는 돈의 신이 동대문이 아니라 동묘에 있는 거겠죠. 동대문은 이미 부자니까요. (앞뒤를 바꿔 맞췄나요?)
얼마 뒤 탑골공원 근방에 가게 됐습니다.
'다리 아픈 분 쉬어가세요' 라고 한영 병기되었습니다.
'나무 주변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라고 한국어로 쓰였습니다.
비가 심하게 내린 직후라서인지, 서울 시내에서 길거리 냄새가 나는 걸 오랜만에 느꼈지요.
오후인데도 탑골공원 옆에는 남성 노인들이 술자리를 벌였습니다. 그 모습을 인사동 길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커다란 나무 화분들을 갖다 놓았더군요. 예전에 없던 것이었지요. 노인들과 관광객, '동료 시민'의 분리지요. 예전에는 가난해도 외롭진 않았는데, 요새는 가난=소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가난해지는 걸 더욱 두려워하고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쓴커피, 보통커피, 단커피라고 매우 직관적으로 써 두었네요.
사실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등은 레시피에 따라 붙은 이름이죠. 즉 만드는 사람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쓴커피, 보통커피, 단커피라는 이름은 마시는 사람 입장입니다. 북한식 번역 같은 느낌도 들죠. 북한식 번역이 사실 꽤 편합니다. 훨씬 직관적이거든요. '정지' 대신 '섯!'이라고 쓴다든가... '섯!'이라고 써두면 몸이 먼저 반응하잖아요. 그런데 '정지' 표지판 앞에 누가 서든가요? 그냥 다들 가버리지요.
탑골공원 앞에 노인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료급식소 때문입니다. 급식 말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지요. 이발입니다.
사실 예전보다 탑골공원 주변은 훨씬 지저분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지저분하다고 욕할 게 아닙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최종적 기준은 사회문화적 구성이기 때문이죠. 세계 몇위권에 드는 서울에서 이들은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 소외에 대한 항변을 사회적으로 설득될만한 언어로 하는 것은 교육 수준으로 미루어보아 불가능하죠. 계속 깨끗해지고, 반짝반짝해지는 환경 자체가 이들을 밀어내는 신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자리를 일부러 더럽히면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고요. 탑골공원 주변의 지저분함은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의 자기 존재 외침일 겁니다. 복지도 그 대상부터 확인되어야 시행될 수 있잖아요.
역으로 보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처럼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차별인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탑골공원은 낙원상가 옆길로, 다시 새로 조성된 송해길과 연결됩니다. 송해길에서 탑골공원까지 걸어 보니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가 왜 자꾸 교체되는지 알 거 같네요. 김신영은 물론 귀엽고 훌륭한 방송인입니다. 그렇지만 술로 남은 일생을 보내는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렵겠죠. 아마 남희석도 그렇겠지만요. 그 마음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송해밖에 없었을 겁니다.
상대적 가난의 시대를 넘는 방법은 가난을 자꾸 가시화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꽁꽁 숨겨두지 않고 이들이 자유롭게(그리고 적당히 더럽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것이죠. (백인) 관광객이 이러한 모습을 모르겠어요? 그들은 보여준 것만 보고 가는 바보가 아닙니다. 파리도 가보면 엄청 지저분하다잖아요. 그런 것이 오히려 빈곤의 존재를 계속 의식시키면서 공동체와 사회가 한데 해결할 과제라는 걸 일깨워주는 거죠.
(암튼 할배들요 술 작작 마셔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