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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03. 2021

게임으로 여행해보는 거야

상식과 형식을 허물면, 새로운 경험이 보인다

코시국 2년 차. 그간 단단히 쌓아 올린 경계 너머의 세상이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년 차 때만 해도 국내의 보석 같은 지역과 공간들을 재발견하며 조금이나마 여행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재발견만으론 충족시키기 어려운 '낯선 공기'의 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의 유튜브 시청 목록은 해외에 거주 중인 누군가의 브이로그라던가, 해외 도시의 길을 걷거나 드라이브하는 영상을 4K로 담아낸 콘텐츠로 가득 차 있다. 한편, 시각적 체험 외에도 낯선 도시의 문화나 역사에 대한 탐구를 위해 조승연 작가의 유튜브 채널 <조승연의 탐구생활>을 구독하고 있는데, 얼마 전 시청한 새로운 방식의 여행 콘텐츠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직접 떠나볼 수 없는 코로나 시대, 그가 제안한 새로운 여행 방식은 바로 '게임'을 통한 도시/역사 여행이었다.



고증이 훌륭한 게임들을 활용해 해외의 도시와 역사를 해설해주는 그의 콘텐츠 ⓒ조승연의 탐구생활



여행의 수단으로 소개된 게임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인상 깊었다. <어쌔신 크리드>는 도시 기반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으로, 주인공인 암살자가 되어 파리나 이스탄불 같은 유서 깊은 도시들을 과거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탐험해볼 수 있다. 게임의 주된 목적은 암살 대상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나, 이 게임이 무엇보다 매력적인 이유는 배경이 되는 도시의 지리/역사적 고증이 매우 훌륭하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파리에서 생활했던 조승연 작가의 경우, 맵을 보지 않고도 단지 기억에만 의존하여 게임 내 파리의 명소들을 찾아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파리와 이스탄불 편을 시청하며 두 곳 모두 지난 여행의 기억과 상당히 유사해 무척 놀랐다.



루브르 궁에 올라 파리의 달라진 모습을 설명하는 조승연 작가 ⓒ조승연의 탐구생활



지리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어쌔신 크리드>에는 당대 도시의 생활상이나 건축, 예술의 디테일 또한 매우 섬세하게 구현되어 있다. 배수 시설이 구축되지 않았던 18세기 파리의 거리는 마치 계곡처럼 물이 흐르도록 길 가운데가 움푹 파여 경사진 모습을 띄고 있으며, 당대 센강과 시장의 모습은 생기와 설렘 가득한 지금과 달리 매우 지저분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편, 오늘날 박물관과 미술관처럼 통제된 공간 속에 모여 전시된 예술 작품들은 게임 속에서 원래 존재하던 장소로 돌아가 작품의 맥락성을 되찾는다. 조승연 작가와 함께 걸으며 도시가 간직한 역사와 달라진 오늘날의 모습에 대한 풍성한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새 도시의 낯선 감촉이 피부로 전해진다.



배수 시설이 구축되지 않아 계곡처럼 경사가 형성된 당대의 골목길 ⓒ조승연의 탐구 생활



코로나19 시대에 등장한 랜선 여행의 방식은 무척 다양하지만, 게임을 통한 가상 여행이 특히나 매력적인 이유는 여정의 주체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그저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동선을 시각적으로 따라가는 것만이 아닌, 직접 자신의 동선을 결정하며 때론 길을 잃기도 하고, 낯선 지형과 지물의 탐색을 통해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것. 실제 세상보다 제한되고 의도된 환경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결정해보고 탐험해볼 수 있는 '비일상의 세계'라는 점에서 여행과 게임의 공유점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조승연 작가 특유의 인문학적 시선을 통해 게임이라는 행위에 역사/문화의 탐구 수단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됨으로써 게임 여행의 매력은 배가 된다.



레벨레이션 시리즈를 플레잉하며 이스탄불의 지리를 설명하는 조승연 작가 ⓒ조승연의 탐구생활



사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게임을 재해석한 시도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존재했다. 개인적으로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시도는 게임 업체 XBOX에서 2019년 집행했던 <Visit XBOX> 캠페인이다. 액션 게임에 관심 없던 이들을 새로운 유저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XBOX는 이들에게 Play 하는 것이 아닌, Visit 해보는 새로운 게임 경험을 제안하였다. XBOX의 수많은 게임 속 환상적 장소들을 '여행지'로 재해석하고, 출판사 및 여행 작가와 협업하여 해당 여행지들을 모아 소개하는 실제 가이드북을 제작했다. 동시에 브랜드의 다양한 경험 접점을 '여행'이라는 성격에 맞게 재설계함으로써 유저들에게 게임을 구매하는 것이 아닌,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듯한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였다. 해당 캠페인은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나 역시도 가장 좋아하는 캠페인의 사례로서 이를 자주 언급하곤 한다.



PLAY가 아닌, VISIT 해보는 경험 ⓒXBOX


실제 출간된 XBOX 가이드북 ⓒXBOX



유병욱 작가는 자신의 저서 <없던 오늘>을 통해 코로나19를 당연했던 것들에 질문을 던지게 되는 '질문의 질병'이라 표현하였다. 질문을 통해 견고했던 어떤 상식들은 과거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동시에 어떤 존재들은 본래의 기능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과 상식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의 디자이너 하라켄야는 '일상의 미지화'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 당연하다 믿었던 존재를 전혀 모른다고 가정할 때 비로소 존재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XBOX와 조승연 작가가 제안한 새로운 게임 경험은 현실의 제약과 미지화적 사고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조승연 작가는 '중요한 것은 형식과 영역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형식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렸을 때, 무엇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 그 물음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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