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와 원형
2017년, 교토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과연 천년고도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오랜 세월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었다. 특히, 예스러운 골목길 사이사이를 걷다 보면 100년 이상의 세월을 간직한 가게들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내게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소를 묻는다면, 스미요시초 거리에 위치한 카이카도 카페(Kaikado Cafe)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곳은 커피 원두와 찻잎을 보관하는 티 캐디(Tea caddy)를 만드는 교토의 장인 브랜드 '카이카도'가 조성한 공간이다.
교토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공간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오래된 서양식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1927년 지어진 이 건물은 교토 노면전차의 차량 기지이자 사무실로 사용되었지만, 1978년부터 열차가 폐지되면서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 이후 공간의 가치를 알아본 카이카도는 2016년 5월, 덴마크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OeO와의 협업을 통해 이곳을 일본 전통차와 커피를 판매하는 카페로 재탄생시켰다.
사실, 당시의 나는 공간과 브랜드가 지닌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이곳을 찾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멋스러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견고하면서도 부드러움을 품은 가구, 황동 소재의 조명과 주전자, 그리고 곳곳에 비치된 전통 공예품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요소에서 신중함과 정성이 묻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티 캐디 Tea Caddy’였다. 커피를 내리는 메인테이블 너머로 진열된 수십 개의 티 캐디는 그야말로 우아하게 낡은 모습으로 손님들을 반겼다. 기본적으로 구리 재질의 티 캐디는 2-3개월 안에, 황동 재질의 경우 1-2년 안에 서서히 색상이 변한다고 하는데, 이처럼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수십 개의 티 캐디는 공간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의 구경을 마치고 휴대폰을 통해 카이카도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놀랍게도 브랜드의 기원은 1875년 창업자인 Kiyosuke Kaikado가 첫 번째 티 캐디 Chazutsu를 생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140여년 전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 티 캐디가 현재까지도 카이카도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꾸준하게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Chazutsu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130여 단계의 섬세한 공정 과정을 거쳐야 하며, 카이카도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전통 방식을 고수하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속 덮개와 뚜껑이 견고하게 맞물려 뛰어난 밀폐성과 보관성을 자랑하는 카이카도의 티 캐디는 세계적으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으며 꾸준히 성장해왔다.
한편, 6대 경영자로서 오늘날의 카이카도를 이끄는 Takahiro Yagi는 티 캐디의 새로운 형태적 실험과 컬래버레이션, 그리고 공간 기획 등을 통해 카이카도라는 브랜드에 새로운 감각을 더하고 있다. 그가 한 일본 매체와 함께 카이카도라는 브랜드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나눈 인터뷰는 무척 인상적인데, 특히 다음 구절을 읽으며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저는 새로운 제품을 구상할 때마다 어떻게든 저희 브랜드의 상징인 이 티 캐디와 연관시키고자 노력합니다. 현재는 티 캐디 제작을 통해 얻은 기술을 바탕으로 테이블 상판 제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카이카도라는 브랜드에 새로운 감각을 더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중심에는 언제나 브랜드의 원형인 티 캐디가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움이라는 기회가 주어질 때면 언제나 브랜드가 시작된 지점으로 돌아가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형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카이카도라는 브랜드를 1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탱해준 강력한 힘이 아닐까. 나아가,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던 공간 전체의 멋스러움도 결국 이러한 고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즉, 티 캐디에 담긴 정성과 우아한 시간성의 가치가 공간의 모든 요소 속에 스며들어 카이카도만의 공기(空氣)로 완성된 것이다.
브랜드의 원형이 확장하는 비즈니스를 지탱하는 구심점이자 꾸준한 영감으로 작용해온 브랜드, 카이카도. 이들이 추구하는 '균형 잡힌 변화'는 혁신의 기로에 선 오늘날의 수많은 브랜드에게 묵직한 물음을 던져준다. 매일 변하는 것들 속에서 브랜드가 지켜내야 하는, 변하지 않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수년 전 혁신적인 신제품을 출시하며 비슷한 물음에 다가갔던 일본 올림푸스의 광고 카피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오늘의 나, 내일의 나
나는 매일 변해간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AF
그래도, 진정한 나는
계속 변하지 않아
변하지 않는 것. 변하는 것
PEN 제3세대 등장
OLYMPUS
<사소한 각주들>
카이카도의 티 캐디는 차 문화를 중시하는 영국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 영구 소장되었다.
어떤 이들은 대대로 물려받아 100년이 넘은 티 캐디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카이카도의 매장을 찾는다고 한다.
Takahiro Yagi의 인터뷰는 2015년 진행된 FASHION HEADLINE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