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와 맥락
이솝의 적절한 PPL(Proper Placement)
드라마 속 PPL을 보고 있자면,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과 뜬금없는 상품의 등장으로 종종 어이없는 웃음을 짓곤 한다. 특히 인기 드라마의 경우, 후반부에 이를수록 홍수처럼 범람하는 PPL로 콘텐츠에 대한 몰입을 방해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시청자로 하여금 불쾌감과 피로도를 유발하는 PPL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브랜드의 매출이 상승했다는 기사를 접할 때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단기적으로는 화제성 콘텐츠에 노출시킴으로써 매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청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PPL이 과연 브랜드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라, 브랜드에 이러한 광고 기회를 제공하는 콘텐츠 자체에도 되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여전히 많은 브랜드가 인기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 자사의 제품 및 서비스를 PPL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효과의 불확실성이나 부정적 측면들을 고려했을 때, ‘우리 브랜드도 무조건 해야 해’라는 강박을 잠시 내려놓고 PPL의 필요성과 그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호주의 코스메틱 브랜드 이솝 Aesop은 브랜드의 무분별한 PPL 진행 방식에 있어 좋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솝은 모든 영역에서 결벽에 가까운 고집스러움을 추구하기로 유명한 브랜드로, 이러한 이솝의 고집스러움은 브랜드가 노출되는 맥락과 공간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일례로, 이솝의 핸드소프를 고정시켜주는 전용 금속 거치대를 구매하려면 본사 측에 사용하려는 곳의 사진을 보내 적합 여부를 허가받아야 한다. 브랜드가 노출되는 공간과 맥락이 ‘과연 이솝스러움과 공유점을 지니는지’, ‘브랜드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지’ 직접 꼼꼼하게 체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솝은 그들만의 세심한 기준점을 바탕으로 호텔, 백화점, 갤러리 등 문화 공간 속 어매니티로 노출되며 매력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솝을 어매니티로 선택한 공간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미지를 이솝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며 공간(혹은 맥락)과 브랜드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매스 미디어 광고를 집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솝이 치열한 코스메틱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무조건적인 브랜드 노출을 지양하고, 철저한 기준에 근거해 노출 맥락에 접근했기 때문일 것이다.
PPL을 고려하는 브랜드가 맥락에 대한 이솝의 고집스러움을 떠올린다면 보다 나은, 혹은 더욱 신선한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PPL을 통해 일시적인 매출 상승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맥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나아가 방송 콘텐츠 영역에 집중된 브랜드의 노출 맥락을 브랜드와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는 다양한 On∙Off 지점으로 확장한다면 더욱 신선한 협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바탕으로, 무조건적인 노출을 위한 PPL(Product Placement)을 넘어 맥락과 시너지가 고려된 PPL(Proper Placement)이 풍성해지길 기대해본다.
이 글을 쓴 지 4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공교롭게도 맥락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소위 '대놓고 PPL'이 하나의 트렌드이자 콘텐츠의 또 다른 매력 요소로 자리 잡았다. 나 또한 맥락 없는 PPL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이 글에서 언급했던 '적절함'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세상은 변하고, 단단해 보이던 생각도 어느 순간 이를 따라서 변하게 되는 것 같다. 앞으로의 나날들에서 나의 생각이 세상의 변화보다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존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