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지만....
<씨네21> 잡지에서 재미난 글을 읽었다. ‘한국형 마블히어로’로 기대받는 <승리호>에 관한 특집 기사였다. 단순히 웹툰이 영화화 되거나 영화가 다시 소설로 출간되는 것과는 다르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영상, 웹툰, 게임 등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열어 둔 프로젝트다.
마블에서 만화는 만화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진행하고 그 안에서 스핀오프나 캐릭터 별 서사, 혹은 어벤져스같은 크로스오버를 만드는 것과 같다. 영화 <승리호>가 보여 줄 우주활극에만 머물지 않고 같은 캐릭터들을 데리고 로맨스나 공포같은 다른 장르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글은 이것을 ‘원천IP’, ‘프랜차이즈IP’ 혹은 ‘슈퍼IP’라고 불렀다.
슈퍼 IP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 확보’로 보인다. 카카오페이지 이정수 대표는 <이태원 클라쓰> 방영 후 박서준 뿐 아니라 ‘박새로이’라는 캐릭터가 뜬 것에 주목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 이영준 부회장이 아닌 박서준만 떴던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여기서 미국의 오래된 만화 ‘아치 시리즈’의 예시를 들어보고 싶다. 아치와 그의 친구들은 1941년 아치 코믹스에서 처음 만들었는데, 그 현대 버전이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리버데일>이다. 이미 여러 버전이 나오며 사골처럼 우려진 이야기지만 강력한 캐릭터 덕에 또 다른 색깔을 입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치 시리즈에서 ‘그린데일’에 사는 사이드 인물 격 사브리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이야기가 ‘사브리나 시리즈’이고,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은 이에 해당한다. 결국 잘 만든 세계관과 캐릭터는 영원히 써먹을 수 있다. 제작자도 재밌고 팬들도 재밌고 새로운 팬 유입도 수월한 선순환이다.
한국이 슈퍼 IP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 해외 시장의 영향이 크다. 이정수 대표는 글로벌이 대한민국 콘텐츠 시장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수익의 반 이상이 해외에서 온다. 앞으로 4-5년 안에 대한민국 원천 스토리 중 만화와 소설 단계에서 1천억원 이상을 버는 작품이 나올 거라고 본다. 이런 작품을 중심으로 할리우드와 국내 영화 자본, 전세계 드라마 시장과 미국 게임 마켓까지 연결되면 하나의 세계관을 보유한 시나리오의 가치는 수천억원, 수조원 단위가 될 수 있다." -글 임수연 <씨네21> No.1258 p.53
예전부터 조금씩 움직임은 있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슈퍼IP 제작에 발동이 걸린 것 같아 기쁘다. 그러나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쓰이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형’이라는 개념이다. 예전에 한 콘텐츠 회사 면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리 제출한 기획안을 검토한 실무자가 ‘다 좋은데, 여기서 한국적인 건 뭐냐?’라고 물은 것이다. 즉시 두 가지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한국적이라는 건 뭘까?’ 그리고 ‘한국적인 게 필요한가?’
일단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초코파이에 새겨진 정(情)이나 판소리에서 드러나는 한(恨)인가? 빽빽한 아파트숲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건의 빠른 진행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 감성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글로벌 시장 진출에 성공한 한국인’의 대명사인 봉준호 감독 영화를 찬찬히 다시 봤다. 그라면 작품에 한국적인 색채를 잘 녹여 글로벌 시청자까지 사로잡지 않았을까 하고.
영화 <설국열차>부터 봤다. 일단 자조적인 느낌이 강했다. 한국이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 찬 느낌보다는 자조적인 웃음코드가 더 잘 통하는 나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긴 했다. 비교와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자조적인 분위기가 꼭 한국의 정체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카우치서핑이나 교환학생, 여행을 통해 본 다른 나라 젊은이들도 취업 경쟁이 빡센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교해 자신과 사회,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더 많은 것 같긴 했지만 사실 국가별 문화별 경계선이 흐려지고 있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좀 조심스럽다.
혹은 거대한 세계관에 비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한 것 같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계급투쟁을 다룬다면 <레 미제라블>처럼 장엄함이나 스케일 큰 액션에 훨씬 초점을 맞췄을텐데, 이 작품은 ‘울분’을 조용히 느낄 수 있도록 집중한 느낌이었다. 신나는 액션보다는 건조한 처절함을 택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외국 디스토피아 영화들도 그런 분위기가 많다. 또 <국제시장>이나 <명랑>같은 텐트폴 한국영화들은 폭발적인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가.
다음으로 ‘한국적인 것이 꼭 필요할까’를 두고 <기생충>을 생각해 본다. 짜파구리, 독도는우리땅 노래, 반지하 등이 나와 매우 한국적인 것 같다. (아! 그렇다면 한국에만 있는 거리, 물건, 음식, 풍습, 건축구조가 등장하면 한국적인 것인가?) 과연 글로벌 시장에서 대박을 친 이유가 좋은 작품이면서 한국적인 느낌을 잘 살렸기 때문일까?
구글에 ‘what is so great about Parasite?’를 쳐봤다. 대부분 스릴 넘치는 플롯라인에 대한 칭찬이다. 영국 <the Guardian>의 한 기사에 따르면
Described by its creator as “a comedy without clowns, a tragedy without villains”, Parasite is more Shakespearean than Hitchockian – a tale of two families from opposite ends of the socioeconomic spectrum, told with the trademark genre-fluidity that has seen Bong’s back catalogue slip seamlessly from murder mystery, via monster movie, to dystopian future-fantasy and beyond. -'Parasite review – a gasp-inducing masterpiece' by Mark Kermode
즉 봉준호 특유의 블랙코미디 정서에 사람들이 무릎을 친 것이지, 무언가 ‘한국적’인 느낌에 반했다는 투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조상인 셰익스피어를 언급한다. <기생충> 덕분에 한국의 작품 시장이 더 열리긴 하겠지만 그건 봉준호의 플롯라인과 계급 풍자적인 캐릭터가 재밌어서이지 한국적인 정서를 잘 살린 것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는 냉전시대 대립각을 세운 러시아를 악당으로 설정해 이야기를 펼친다. 그게 전세계 시청자를 사로잡은 이유 중 하나일까? 아니, 러시아든 어디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기묘한 이야기>가 히트를 친 이유는 유년시절 소꿉친구들에 대한 판타지와 80년대 향수를 잘 살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 80년대이므로 '미국적'인데 통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 레트로는 당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둘을 똑 떼어서 볼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레트로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올드팝과 복고 패션 등 80년대 미국 레트로에 대한 갈증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미국이라는 국가 특성 상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한국적’인 색채를 살리기 위해 시대느낌을 가미 한다고 해서 외국 시장에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매력적인 플롯과 캐릭터로 승부를 봐야 한다.
넷플릭스에서 인기 있었던 스페인 드라마 <엘리트>,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노르웨이 드라마 <스캄>도 마찬가지. 딱히 그 나라의 정체성이 좋아서 본 건 아니다. 스페인이나 노르웨이가 아니라 뉴질랜드나 스리랑카였어도 아무 상관없다.
물론… 발리우드가 있긴 하다. 아주 가끔씩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먼지 날리는 느낌이 그리워질 때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정체성이 너무 강한 탓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고 자칫하면 ‘한국 드라마는 이런 느낌’이라고 고착화 시킬 우려가 있다. 한국 홍보가 아니라 글로벌 수익이 목표라면, 최대한 많은 대중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슈퍼 IP의 탄생은 우리가 그동안 내수시장만 바라보았기에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 특히 여러 사회와 문화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주제의 풀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개별 제작사나 작가의 색깔을 다듬어나갈지언정, ‘한국적’인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