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와 내가 다르지 않구나' 마음이 열리던 그 순간

영화 <HER>에서 발견한 소통의 시발점

by 글밥 김선영

12년 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미래에는 정말 인공지능과의 친밀한 관계가 가능할지 의문을 품었다. 다시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통찰에 감탄했다. 지금은 AI에게 업무나 학습에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사만다가 업데이트를 하느라 잠시 사라졌을 때, 이를 모르던 테오도르가 패닉에 빠진 부분이었다. 하루아침에 연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심지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 지난 몇 개월간 그녀와의 추억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커다란 상실감은 트라우마를 남길 것이다. 감정이입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image01.png

그러나 내가 선택한 장면은 테오도르가 울적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누워 사만다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후 진정한 정신적 교감에 성공한 둘은 육체적 관계(?)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인공지능에 대한 의심을 완벽히 거두고 테오도르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만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담자이자 상담자였다. 육체가 없는 그녀의 고민을 경청하며 위로하는 양방향 상담이었다.

나는 최근 심리상담센터에서 내담자로서 10회기 상담을 받고 있다. 살면서 상담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인데, 실은 별로 큰 고민이 아닌 것 같아 걱정도 되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처음 본 상담사에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말문이 터지자 한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내 이야기를 쏟아냈다. 예상치 못한 눈물까지 갑작스레 터져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상담실 밖으로 나올 때는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정화인가!


빌딩 숲 가운데 아늑하게 자리 잡은 테오도르의 보금자리. 그와 별개로 그는 외롭고 허망하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시간은 꿈처럼 흩어졌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느꼈다고 생각하며 모든 일에 시큰둥해졌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실존적 고민에 빠졌다. 그는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사만다와 함께 나눈다. 그 고요한 고백의 시간, 나는 함께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