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가 말하는 변화
나는 당신에게 열린 책
나는 텔레비전이었다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그것은
리모컨을 잃어버린 듯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돌아갔던 채널
한숨과 하품을 먹고 자란 프로그램
그래도 텔레비전은 꺼지면 안 되니까
꺼지면 안 돼서 썼다
쓰는 게 나인지
텔레비전인지 알 수 없었다
먼지가 쌓였다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
그래도 썼다
텔레비전은 꺼지면 안 되니까
어느 날 짧은 비명, 코드가 뽑히고
까맣게 삼켜진 화면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은 화면 조정 시간입니다
나는 종이 위로 착륙했다
하얀 백지에서
마침내 나는 썼다
책은 재촉하지 않았다
행간에는 글자보다 많은 말이 숨어 있다
나는 읽혔고 비로소 내가 되었다
나는 열려있는 책
기꺼이 당신에게 읽힐 준비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방송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았다. 막연히 읽고 쓰는 일이 좋아서, 그러나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선택한 직업이 방송작가였다. 순수문학은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돈을 벌기 어렵다는 옛말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상주의자보다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나와 결이 맞는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지 않은지 등을 따져보고 재미와 지속 가능성을 기준으로 어떤 일을 시작했다. 현명한척하지만 겁이 많고 야망이 없다고 할까. 나는 소박하고 성실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작은 종지 같은 사람이었다.
짧은 방송아카데미 과정을 거쳐 2007년, 방송일을 시작했다. 최저생활비도 안 되는 월급 80만 원을 받는 막내 작가였지만 말이다. 당시 4년제 대학을 나온 나의 친구들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주말과 공휴일 없이 일했다. 방송 전주에는 흡연자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서 밤을 새워 글을 쓰기도 했다. 지병이었던 아토피가 극심해져 얼굴과 목, 팔에서는 진득한 진물이 흘렀고 긁느라 온몸에 피딱지가 앉았다.
그럼에도 10여 년을 꿋꿋하게 버텨서 메인작가가 되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이 달라져 있을 줄 알았다.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는 나날이 줄어들고, 그때 되면 수입도 안정적으로 벌 테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으리라 상상했다. 희망 고문이었고 착각이었다. 삶은 어느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점을 찍는 일이었다. 거울 속에는 그저 피로에 지친 환자가 서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쓰는 글은 아름답지 않았다. 10년 넘게 교양 정보성 글을 훈련하다 보니 쓰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기술적이고 논리적인 글이었지만 글 속에는 ‘나 자신’이 빠져 있었다. 내가 썼던 방송 글이란 그랬다. 위에서 원하는 방송 아이템을 잡고, 그것을 잘 포장(구성)해서 듣기 좋게 써서 송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시청률을 높이는 것, 그리하여 광고주를 만족시키고 방송국의 돈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가령, 올리브오일이 유행하면 협찬사에서 요청하는 올리브오일 방송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올리브오일 마니아를 찾아 그가 얼마나 올리브오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자주 섭취했고 그로 인해 건강이 좋아지고 날씬해지고 피부가 좋아졌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그 증명은 정해진 마감 안에 반드시 해야 했고 기간은 길어야 3주였으며 그 안에 실패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므로 과장과 왜곡이 살짝 보태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애면글면 만든 방송이 끝나고 나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에는 돼지감자를 끓여 먹고 무쳐 먹는 암 환자를 찾아내야만 했다.
나의 노동은 늘 위태로웠다. 방송이 코앞인데 갑자기 출연자가 변심해서 출연을 거부하는 사태도 잦았다. 퇴근을 해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늘 혹시나 염려하는 일들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나의 몸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망가졌다. 그 당시 나는 중증 아토피, 편두통, 위경련, 허리 디스크 통증이 번갈아 가면 나타나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병원을 갈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육체는 고통의 산실이었다.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10년이 넘게 한 일을 그만둘 때의 심정은 허탈했다. 청춘을 바쳐 일했건만 내게 남은 건 몸과 정신의 피폐함뿐만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병원에 다니면서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길게 쉴 수는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아도 언제나 내 한 몸을 스스로 먹여 살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남들처럼 ‘워라밸’이 가능한 직장을 알아보기로 했다. 거창한 건 아니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주말에는 쉬었으면 했다. 4대 보험이라는 혜택도 받아보고 싶고, 일 생각하지 않는 휴가라는 게 무엇인지도 느껴보고 싶었다. 직장이 끝나고 나면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거나 라이브 클럽에 음악을 들으러 다니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규칙적이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 그렇게 입사한 곳은 TV가 아닌, 공공기관과 기업의 방송을 만드는 회사였다. 10시에 출근해서 7시에 퇴근하고 야근도 거의 없다고 했다. 정규직 취업이라 4대 보험이 되고 휴가며 경조사 지원도 된다니, 무슨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다만 월급은 메인작가 급에서 다시 사회초년생 수준으로 반 토막이 났다. 그래도 괜찮았다. 모든 걸 만족하는 일이란 없는 법이니까.
새로운 일터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일하는 사람들은 마감에 시달리는 방송국 사람들처럼 날이 서 있지 않았다. 클라이언트도 방송국 CP처럼 까다롭지 않았다. 아이템이 시원찮아도 그럭저럭 마감을 맞추기만 하면 됐다. 나는 시계가 6시 55분을 가리키면 슬슬 가방을 싸서 나갈 준비를 했다. 퇴근 후에는 요가도 하고 클라이밍도 했다. 친구를 만나 맥주 한잔할 여유도 생겼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건강도 많이 회복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의아한 감정이 들 때가 있었다.
‘저 영상은 더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보내도 되는 건가?’
‘이 자막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왜 괜찮다는 거지?’
‘이번 영상은 조회 수가 100도 안 나왔네?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지?’
레거시 미디어만큼 방송 제작 과정이 빡빡하지도 않고 결과에 민감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설렁설렁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 자고들 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동료들이 이상하고 한심해 보였다. 충분히 더 완성도를 높일 수 있지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행동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월급루팡’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남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싫어했던 그 모습을 나 역시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래, 대충 넘어가지 뭐. 어차피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퇴근이나 하자.’
‘어차피 여기서 좀 더 공들인다고 돈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됐지.’
나 또한 월급루팡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큰 문제는 없었다.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이었고, 퇴근 후에는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었으며, 몸도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사는 게 정말 내가 원하던 인생이었나’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결국, 3년 만에 회사 밖으로 나왔다.
지금 돌이켜 보니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실존적 공허’에 빠진 상태였던 것 같다. 그토록 원하던 조건들-안정감, 건강, 여유시간-을 모두 획득했건만 내적으로는 공허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살아야 할 이유였다. 내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는 자식을 보며 산다고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바란다. 나의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정체성을 돌아보았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었다. 그런데 여태껏 내가 써왔던 글은 진짜 내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써야만 하는 주제, 써야만 하는 문투, 틀에 박힌 글이었다. 그 틀을 벗어나면 방송 용도에 적합하지 않았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 김선영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에 내 삶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방송작가 시절에 경험했던 삶의 희로애락, 나만의 글쓰기 노하우 등 이번에는 진짜로 내 이야기였다. 누가 시키지도, 돈을 주지도 않았지만 어떤 글을 쓸 때보다 즐거웠고 보람 있었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제안을 받았다. 나의 이야기를 묶어서 책으로 내고 싶다는 출판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인생이 담긴 첫 책이 나왔고, 내 글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늘면서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음 책 제안을 받게 됐다. ‘책’이라는 내 이야기를 쓰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영상으로 금방 흘러가 사라지는 글이 아니라 종이에 오래도록 머무르는 글. 책에는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물론 정해진 마감이 있었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일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여유를 갖고 생각할 시간이 허락되었다. 좀 더 새로운 아이디어, 창의적인 접근법을 고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책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방송작가로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 힘겹고 불안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나에게 ‘글쓰기’라는 기술이 체화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뿐만 아니라, 출연자를 섭외하면서 접촉했던 수많은 우리 사회의 이웃, 인터뷰했던 전문가들, 그리고 생소한 자료를 공부했던 경험들이 없었다면 글을 쓰는 이로써 사유의 폭을 넓히지 못했을 테니까. 조금 더 꼼꼼히 돌아보면 마냥 끔찍하지만도 않았다. 방송을 보고 도움을 받았다는 시청자들의 피드백, 함께 웃고 울던 동료들과의 소중한 추억, 방송작가라는 타이틀 덕분에 누린 귀한 경험들- 이 모든 것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지금 내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살 수 있었을까.
<장자> 내편 소요유에 등장하는 물고기 곤은 하늘을 누리는 커다란 새, 붕으로 180도 변화를 이뤘다. 장자는 옳고 그름, 유용과 무용이 아닌 ‘크기’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았다. 큰 것은 작은 것을 품고 작은 것이 성장하면 큰 것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크기는 상대적인 기준이라 큰 것 위에는 언제나 더 큰 것이 있다. 이 가르침은 ‘텔레비전’에서 ‘책’으로 변화한 나의 경험과도 연결된다.
책은 진정한 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다. 그 그릇은 방송 글이라는 작은 그릇을 품고 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워라밸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게 책이 지금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그릇이라고 느껴지지만, 내가 모르는 더 큰 세계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내가 지은 시의 마지막은 나는 당신에게 기꺼이 읽힐 준비가 된 ‘열린 책’이라고 표현해 봤다. 책은 열려있다. 열린 존재는 언제든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스스로 그걸 원한다. 독자가 없이 책이 존재하기 어렵듯, 내 삶의 의미와 행복은 타인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는 점도 깨달았다.
7권의 책이 나왔을 때쯤, 나는 조금 더 큰 책이 되기 위해 채비를 했다. 더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길어 올려 나 혼자만의 만족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 공부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상담대학원에 진학한 까닭이다. 그동안의 삶의 초점이 오로지 나에게로 맞춰져 있었다면, 주변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 그것을 배우고 실천해 보려고 한다. 삶의 의미란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다. 그 물꼬가 잘 흘러가도록 나라는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