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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과 편집 Apr 23. 2019

위급상황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의식을 확장하는 ‘반복’의 힘

 자! 지금 당장 – 언제, 어디서든 상관없이 – 내 앞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해보자. 바로 소화기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인가. 진압하지 못할 규모라면 재빨리 대피할 경로는 어떻게 되는가. 가정이나 상가 내에서 발생한 화재는 초기 진압으로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불이라도 막상 화재가 발생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소화기를 들어 안전핀을 뽑고 불을 향해 쏘면 된다는 ‘생각은’ 가득하다. 근데 과연 실제 상황이라면 ‘생각만큼’ 쉽게 행동할 수 있을까. 


화재 발생 시 초기 진압으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몇 해 전, 흰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이었다.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시골 고향집에서 자고 있었다. 그때 - 조금 이른 아침이었지만 - 누군가가 우리집 현관문을 열고 외친 “불났어요”라는 한마디에 형광등처럼 정신을 차린다.

우선 우리집은 아니다. 옷 입을 생각도 못한 채 얇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혼자 살고 계시던 뒷집 할머니댁에 불이 났다. 실외 화목 보일러에서 시작된 불이 옆에 쌓아둔 마른 장작에 번져 지붕까지 옮겨붙었다. 불이 난 지점 바로 옆에는 LPG가스통이 있다. 아주 큰 불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폭발할 수도 있다. 걱정부터 앞섰다. 

 20여 년을 살아오면서 실제 화재 현장을 마주한 것이 처음이었다. 특히 LPG가스통이 폭발한다면 집이 통째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때문일까. 매우 급박한 상황이지만, 정말 단순하게도 ‘물을 뿌려 꺼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혹은 사극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물 양동이를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해서였을까). 어쨌든 당장 수돗가로 뛰어갔다. 한 겨울이었고 마당에 있는 수도는 꽁꽁 얼어버렸다. 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 물이 담겨있는 세숫대야가 있었다. 최대한 물을 흘리지 않게, 그러나 빠르게 그것을 들고나가 뿌렸다. 물론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나와 할머니, 어머니, 뒷집 할머니까지 그렇게 2~3번 정도 뛰어다니며 물을 뿌렸다(아버지는 아침 일찍 외출해서 집에 안 계셨다). 불을 끄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소방서와는 거리가 먼 지역이라 119에 전화해도 도착까지 최소 10분은 걸릴 것이 눈에 뻔했다. 전화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있다가 LPG가스통이 폭발해버리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때 평소 거실 한 구석에 모셔두었던 소화기가 머리를 때리듯 떠올랐다.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소화기를 가지지고 나오는, 그 20초도 안 걸리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소화기로 저 정도 큰 불을 잡을 수 있을까

평소 관리를 안 했는데 발사는 될까

게이지 눈금이 정상적인 범위에 있었나

안전핀을 뽑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평소 소화기의 위치를 파악해두면 화재 발생 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불은 꺼졌다

 다행히 소화기는 평소 있던 곳에 있었고, 재빨리 들고나갔다. 분말 소화기였다. 배운 것을 떠올리며 실행에 옮겼다.     


<소화기 사용법>

① 안전핀을 뽑는다

② 바람을 등지고 호스를 불 쪽으로 향한다

③ 손잡이를 움켜쥔다   


 생각보다 분말이 발사되는 힘이 강했고 범위가 넓어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다행히 LPG가스통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이 난 곳도 집 외부였기 때문에 큰 재산적 피해도 없었다. 잔불이 다시 살아날 경우를 대비해 집 내부에서 호스를 연결해 물을 더 뿌렸다. 뒷집 할머니께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연기가 또 난다 싶으면 바로 이야기해달라고 전했다. 소화기도 하나 더 있었다. 소화기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 해보고 큰일을 당할 뻔했다. 이때부터 이사를 하거나 새 직장을 가면 무조건 소화기부터 확인한다.   

       

반복 훈련의 힘은 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아버지는 동네 의용소방대원이었다. 덕분에 경기도소방학교에서 열린 ‘어린이 소방캠프’에 참가한 경험도 있다. 소방호스나 소화기를 직접 사용해보고, 화재 현장에서 탈출하는 교육을 받았다(지금도 어린이 소방캠프를 수료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이후에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군대에서 소화기 사용법을 배웠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들이라면 이렇게 화재진압에 대한 교육을 10번 이상 받지 않나 싶다. 때문에 나는 어느 때라도 불이 난다면 재빨리 소화기를 찾아 초기에 진압할 자신이 있었다.


매년 받는 심폐소생술 교육

 자전거 라이딩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직원을 함께 있던 동료들이 심폐소생술(CPR)로 살려냈다. 지난달 26일 노원구청 라이딩 동호회 ‘느림보’ 회원들은 퇴근 후 뚝섬으로 자전거 라이딩을 떠났다. 그러던 중 돌아오던 길에 회원 최 모 팀장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동료의 자전거를 덮쳤다. 뒤를 따르던 신 모 주무관은 쓰러진 동료가 호흡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이와 동시에 한 모 과장이 서둘러 119에 신고했다. 동료들은 소방서 상담요원과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안내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계속 실시했다.
 약 8분 후 119 구급대가 도착하고 구급대원이 심폐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AED) 전기충격을 반복하자 최 팀장은 정신을 되찾았다. 구급대는 최 팀장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다. 현재 최 팀장은 수술을 마치고 지난 12일 퇴원해 건강을 회복 중이다.
 이들의 침착한 대응은 구청 직원이면 매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심폐소생술 교육’ 때문이다. 구는 지난 2012년 전국 최초로 심폐소생술 상설교육장을 개설, 매년 3만 명 이상의 주민이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학생, 교사, 경찰 등 주민과 직원 포함 3만 4983명이 교육을 이수, 현재까지 21만 8356명이 교육을 받았다.     

[출처] - 국민일보

 심폐소생술도 소화기 사용법과 마찬가지다. 배울 때는 어려울 것 하나 없다고 느껴지지만 막상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몇 번은 더 배웠을 ‘심폐소생술’이지만, 직접 시법을 보여달라고 하면 – 과정이 어렵지 않음에도 – 제대로 하는 사람이 드물다. 심폐소생술에 대해 글로 쓰거나 말로 하는 것은 대부분 잘한다. 복잡한 과정이 없기 때문에 머리는 금세 완벽히 이해했다. 하지만 위급상황에서는 머리(의식)보다는 몸(무의식)이 더 빠르게 판단을 내린다. 심폐소생술도 직접 연습하고 반복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다.            


반복의 의미에 대하여

빙산은 수면 위에 보이는 부분보다 수면 아래 잠겨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크다.

 사실 우리 주변을 살펴본다면 ‘반복’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할 때 많이 쓰인다. 우리 자주 하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 ‘반복 업무’, ‘반복되는 불운’ 등. 반대로 ‘반복되는 여행’, ‘반복 휴식’, ‘반복되는 행운’ 등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반복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필요한 힘이다. 군대, 경찰, 소방서 등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분야에서 끊임없이 반복훈련을 실시하는 이유다. 

흔히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빙산에 빗대어 표현한다. 의식의 영역은 빙산의 일각으로, 무의식은 바다에 잠겨 보이지 않는 큰 빙산으로. 반복은 무의식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실수 또는 행운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실력이 되는 것처럼.

 이런 힘은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이나 슬픔을 이기기 위한 훈련을 반복한다면, 실제 힘든 일이 닥쳐와도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애초에 힘든 일이 없는 것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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