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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희 Sep 10. 2018

방문 학습지를 하며

성인구몬러의 이야기

이 글은, 내가 구몬일어 회원으로서 일년 9개월 동안 수업을 들으며 겪었던 일화와 소감을 쓰고자 한다.

하지만 구몬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성인학습지 회원이 되는지 마는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의 자유다(정말이다. 구몬은 추천인 제도도 없고, 나는 교원그룹 공채도 떨어졌으며, 구몬 선생님이 될 생각도 일단은 없다. 권유는 많이 받았다.). 난 그저 내가 구몬을 하면서 겪은 재미있는 일화들을 나누고 싶다. 성인 구몬이 유행을 탄 지도 꽤 되었으니, 그럴만 한 시기인 것 같다.


어쩐지 내가 구몬 하는 모습을 보면 다들 구몬에 '영업'되곤 한다. 성과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숫자로 말하자면, 내가 작년 1월 3일 처음 구몬을 시작한 이래 내 주위의 친구 6명이 구몬을 시작했다. 아무리 내 친구들이 다 미대생이라 오타쿠들이고 일본어를 배우는 데 부담이 없는 친구들이라고 하더라도 6명은 의미가 있는 숫자다. 성인 여자 여섯이 모여서 카페에서 구몬 학습지 푸는 모습...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만 내 친구들 사이에서만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제는 본인과 안 맞아 그만 둔 친구들도 있지만, 친구들이 구몬을 하게 한 데에는 내가 구몬에 취미를 붙이고 하는 모습이 큰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내 구몬 얘기 중 어떤 것들이 이 친구들에게 재밌게 느껴졌을까?


지금 나는 jlpt n2등급에 합격하고 n1 시험을 준비중이다. 하지만 사실 시험이나 어학점수를 따기 위해 구몬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처음 구몬을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전시를 끝내고 보름 정도 놀았을 때다. 더이상 대학에서 들을 수업도 없고, 운동을 싫어하니 하는 운동도 없고, 무슨 학원을 다니자니 학원비가 부담되고. 이렇게 아무런 계획 없이 늘어져있는 상황을 내가 견디기 어려워 할거란 것은 경험으로 미루어 알고 있었다. 마침 트위터 등지에서 성인학습지 붐이 인지 좀 되었을 때라, 구몬이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일주일에 한 번 구몬 선생님의 방문으로 내 생활의 루틴을 만들고자 구몬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 구몬 선생님이 오셔서 수업을 하고,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교재를 풀기 위해 일어나서 손을 움직이는 최소한의 루틴. 내가 해 뜨고 잠들어 오후 늦게 일어나더라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나에겐 상당히 큰 무력감과 공포로 느껴졌기때문에 일주일 중 하루에 불과하더라도 무언가 필요했다. 구몬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거실 청소도 하게 된다(오직 선생님이 오시는 거실만.......).


구몬학습은 매주 선생님이 집으로 방문하여 15분 내외의 수업을 제공한다(선생님이 방문하지 않는 통신학습도 있지만 나의 의도는 오로지 생활 루틴 만들기였기때문에 방문교사가 필요했다). 교재는 교원그룹에서 제작한 것으로 구몬학습법이라는 독자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회원은 교재를 받아서 일주일간 스스로 학습하고 다음 주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으며 일주일간의 학습을 체크한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며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가 친숙하고,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는 알고 있었기때문에 완전히 초급은 아닌 단계부터 시작했다. 벌써 일년 반도 더 된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시작한 A단계 문장은 오늘은 학교에 갑니다, 와 같은 문장들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엄청나게 많이 쓰게 한다. 언어의 원리보단 용례에 집중하여 반복하는 방식이다. 입에 붙여서 외고 나면 원리는 낯설어도 언어는 낯설지 않다. 이런 방식이 언어 공부에 효율적이기는 한 것 같다. 요새 유행하는 '회화'에 치중한 학습방식이기도 하니, 그동안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어도 비슷한 방법으로 해치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기도(하던 때도 있었)했다.


학습지를 풀며 깨달은 건데, 손을 움직이는 것과 내가 한 것이 바로바로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쾌감은 상당히 크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 전공이 디자인이어서 그런지, 혹은 무슨 일을 하든 비슷할런지, 나에겐 무척 낯선 성취감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의 대부분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느라 내가 쓴 시간에 비례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학습지는 결과가 딱 맞춰 비례한다. 손이 뻐근하도록 일본어 문장을 받아쓰고 나면 반드시 그만큼의 학습지가 쌓여 있다. 이번 주의 학습지를 끝내면 새로운 분량의 학습지가 기다린다. 정체되는 기간 없이 내 시간의 결과물이 쌓여나간다.
학습지는 정해진 정답이 있다. 그게 또 나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정답이 없는 곳에서 정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커다란 무력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학습지는 보통 앞에서 나온 구문들을 베껴 쓰는, 정말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과정이 있으며 달성하기도 쉽다. 질적인 노동에 익숙해진 내게 구몬의 양적 노동이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이쯤되어 구몬 학습지를 하며 가장 큰 사건이었던 구몬 교사 권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면 지나가는 권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가 화근이 되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선생님이 집에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구몬 사무실(지부)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운 좋게도 우리 집 2분 거리에 사무실이 있었다. 잠깐 사족이지만 사무실 위치를 설명하며 선생님은 내게 4층은 재능교육이니 헷갈리지 말고 3층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 동네에는 어린이가 많아서 지나치게 근접한 두 학습지 회사 모두 사이좋게 잘 되는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구몬 사무실을 그렇게 자주 보지 말았어야 했다. 특히 지부장님께 20대 중반 갓 졸업한 여대생 얼굴을 자꾸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다(나이가 어린 선생님이 상대적으로 학부모에게 좀더 인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성인회원답잖게 너무 성실했다. 불성실한 구몬 학생들을 잘 돌볼 수 있을만큼.
그 날도 평소처럼 구몬 사무실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날까지 선생님이 나에게 구몬 선생님이 되는 것을 권유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평소 어른들의 말을 나이스한 미소로 경청하는 내 습관에 기대어 대답했었다. 아, 네! 그렇게 사는 방법도 있겠군요! 그런데 그런 나이스한 대답이 특이한 경험을 만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니 선생님이 나에게 잠깐 10분정도(분명 10분이라고 하셨다) 시간이 되냐고 하셨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마침 지부장님이 자리에 계시기도 하니 잠깐, 상담을 하고 가라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입사지원서까지 쓸 뻔 했다. 다단계 회사에 말리면 이런 기분일까? 한사코 거절하고 아직은 전공을 살려보고싶다는 말을 꽤나 단호하게 하고 나서야(같은 내용을 유하게 했을 때는 한사코 붙잡으셨다)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미 수업이 끝날 예정 시간에서 한시간이 넘게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약간은 무섭고 약간은 우스운 경험인데, 이후 학습지에 대한 친밀감이 확 늘어나기는 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날 나는 학습지 선생님의 계약 방식이 어떻게 되는지, 언제 언제 모집하는지, 보통 수입이 어느정도인지, 학습지 교사가 되기 위한 연수 기간은 얼마인지와 더불어 구몬이라는 회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까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후 취준에 애를 먹을 때마다 구몬 교사를 제안받은 것이 생각나며, 학습지교사가 되는 길이 적잖은 유혹으로 다가왔다(이후 뉴스에서 학습지 선생님들의 고충이 보도되면서 그 유혹은 나와 약간 거리를 둔 상태다). 그리고 그 때 학습지 교사가 된 나를 상상해보던 것이 내가 지금 내 인생이 전공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데에 약간의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특별한 경험은 아니지만 드문 경험을 하게 해준 “그렇게 사는 방법도 있겠군요!” 마인드.


성인회원 치고 무척 성실했다고 밝혔는데,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지금 동네 성인 구몬러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새로 입회하는 성인 회원이 있으면 내 얘기를 꼭 해주신다고 한다. A단계에서부터 시작한 회원이 지금 jlpt 최고 등급을 준비하고 있을 만큼 실력이 늘어났다고. 부담스러우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다. 사실 처음에는 일본어 실력과 거리가 먼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국 일본어 역시도 잘하게 됐다. 무언가를 잘 하고 싶으면 일단 하는 척을 하라더니, 내가 딱 그짝이다. 이렇게 이년 가까이 구몬을 하면서 들인 시간만큼 발견하고 얻은 것도 많다. 구몬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뭔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사실 이건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아 알게 된 나의 강점인데, 한번 인식하고 나니 다른 일도 꾸준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붙는다. 뭔가의 결과가 성에 차지 않고 첫술에 배부르고 싶다는 조급한 욕심이 들 때 구몬을 해온 나날들을 생각한다. 조금씩 조금씩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성장하면 돼, 하고 나를 다스린다.




어저께에는 카페 옆자리에 앉으신 50대 여성분이 너무나도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기에 말씀을 여쭈어 보았다. 왜 일본어 공부를 하시는지가 궁금해서. 같이 지내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축에 들기는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적으로 말을 붙이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실례되는 질문은 아닐까 기분 나빠하시면 어쩌지하고 한참을 고민하고 친구들한테 물어보기까지 한 뒤에야 말씀을 여쭤 보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카페에 자주 오시는, 나와 동갑인 딸이 있는, 그 딸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돼서 딸을 보러 일본에 갔을 때 쓰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사실 내가 그분께 일본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물은 건 내 일본어를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지 찾고싶어서였다. 그 분의 답변이 내 상황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이런 내용을 같이 나누는 것이 내 생각 이상으로 무척 좋았다. 나와 동갑인 따님의 꿈과 일본어 공부 과정을 들으며 힘을 얻은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타인의 삶에 이렇다 저렇다 한 감상을 쓰는 것에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들지만) 타국의 딸에게 찾아가기 위해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 역시도 감동이었다. 그 때 나는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상황이었는데, 그저 그 분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이 풀렸었다.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꾸준히 공부해서 자신감이 있지 않았더라면 모르는 사람에게 감히 말을 붙여볼 생각을 해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거절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또 꽤 큰 안정감을 주었다. 여성분은 그 날 카페를 나서며 나에게 카페에서 마주치면 종종 인사하자고 하셨다.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안정감으로 더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는 선순환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멀리 나간 생각일까?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일단 글감은 하나 얻었으니 손해보는 일은 아니었다.




두서없고 길기까지 한 개인적인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실 분이 몇이나 계실지는 모르겠다. 개인의 경험이라 쓰면서는 무척 재밌었는데, 읽으시는 분들도 재밌었을까?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게 정말 재밌는 일화들이었다. 그런데 친구들 말고 다른 분들의 감상을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진다. 바로 몇 문장 전에 자신감의 선순환 운운 해 놓고, 민망하다. 모쪼록 즐겁게 읽으셔서 제가 이런 글을 써서 올려도 아무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주셨으면 한다. 하지만 가능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면 더 좋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전에 재밌게 읽으셨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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