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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원 Sep 14. 2023

박사 어렵네!

0집 석사의 설움

요즘 노르웨이 생활 자체는 안정이 돼서, 사실 크게 글 쓸거리가 없다.


여기서의 안정은 마음의 안정을 의미한다. 그냥 이래저래 마음도 다잡고, 몇 가지 변화를 주면서 평온하게 살게 되었다.


그래서 삶에 대한 고민은 크게 없는 편인데, 한쪽이 진압이 되니, 다른 쪽의 문제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요즘 일(연구)가 제대로 안되는데, 원래 안 됐었는데 그전에 삶이 힘들어서 인지를 못했던 건지, 아니면 갑자기 더 안되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친구랑 카톡으로 수다를 떨다가, 같이 아는 친구가 최근에 유튜브에 두 번째 앨범을 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문 가수 아닌 그냥 직장인인데, 취미로 음악을 하는 친구다. 

그래서 우리끼리 표현을 하기 그는 벌써 2집 가수다.


최근에 도서관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Researcher's breakfast라고 한 달에 한번 아침에 밥을 주면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을 발표하는 그런 자리다. 예전에 어찌어찌 추천을 받아서 발표를 하게 됐다.


한국에 있을 때 강의도 많이 하고, 강의 외적으로 이런저런 발표를 많이 했어서 발표자체는 어렵지 않게 느낀다. 그리고 내 방식으로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재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 주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이런 발표자리가 부담스러운데, 그 이유는 아직 마땅한 나만의 실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자기가 한 연구에 대해서 발표를 해야 하는데, 아직도 나는 남의 연구들을 짜깁기해서 발표를 하고 있다.


나는 0집 석사다.


이게 그냥 개발자일 때나, 석사일 때, 또는 강사일 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왜냐면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걸 잘 전달해 주는 것 만으로 드 유의미한 "기여"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박사 과정이고, 직책은 뭐 "Research Fellow"인가 이런 건데, 실제로 연구를 해서 이룬 성취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성취는 어떠한 저널이나 학회에 합격한 논문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아직 제대로 감을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이 논문 쓰는 게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게,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라기보다 뭔가 기준이 없는 느낌이다.


좋은 연구와 좋은 논문은 무엇일까?


인용수가 많은 논문이 좋은 논문일까?

아니면 유명 학회에 합격한 논문이 좋은 논문일까?

아니면 누가 읽어도 정말 탄탄하게 잘 작성된 논문이 좋은 논문일까?


이것도 어디서 건너 듣기는 하는데, 와안~전 초기 학회나 저널들은 사실 지금처럼 뭔가 경쟁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정 연구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자기가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실험을 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싶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공유를 하는 과정이 점점 커져서 이러한 저널 또는 학회가 됐다고 한다. (아마 한 100년 전쯤?)


그런데, 요즘은 경쟁이 엄청 치열해져서 과거에 따뜻했던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일단 '탑 티어' 학회라는 암묵적인 리스트가 존재하는데, 여기서 암묵적이라는 이유는 실제로 검색을 해보면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정한 내용은 아니다. 그냥 국가별 분야별로 더 인정을 해주는 그러한 학회들이 있다.


특히 인공지능 쪽 학회가 엄청 활발한데, 요즘은 한번 학회가 열리면 쉽게 1만 건이 넘는 논문들이 제출된다. 그리고 보통 그중에 20% 안팎으로 합격이 된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제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그러면 이 논문들을 리뷰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야 한다.


나도 최근에 주변 교수님들이 처음으로 진행하는 학회에 리뷰어로 잠깐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리뷰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다. 약간 최초라 그런지 무작위로 논문이 할당된 것 같은데, 이게 내가 생판 모르는 분야의 논문을 받게 되면 이걸 뭐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온다.


그렇게 되면 지난번 내가 받았던 리뷰처럼, 뻔한 소리 해야 한다. '실험이 부족하다'


이게 참 리뷰를 하면서도 못할 짓인 게, 누군가는 몇 달 또는 몇 년을 써서 연구한 내용일 텐데 내가 한 30분 정도 읽어보고 그 사람의 논문을 평가하는 게 맞나 싶다.


그리고 이게 또 반드시 좋은 학회가 더 합격하기 어렵고 안 좋은 학회가 합격하기 쉽고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익명의 리뷰어가 30분 읽어보고 어떤 느낌을 받는지가 중요하다.


일부 학회는 합격한 것뿐만 아니라 불합격한 논문까지 박제를 하고 리뷰를 볼 수 있게 해 놨는데, 그곳에 들어가서 합격한 논문과 불합격한 논문을 랜덤 하게 다운로드하여 놓고 찬찬히 읽어보면 사실 뭐가 합격한 것이고 뭐가 불합격한 논문인지 나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직 합격을 못했나...)


아무튼 몇 번 논문을 작성을 해봤는데, 내가 작성을 하고도 이게 잘 쓴 건지 못쓴 건지, 유의미한 건지 판단이 안된다.


또 최근에 인공지능 논문쪽이 약간 인플레이션이 심해져서 그런지 수학적 증명을 엄청 강조하는 것 같다.


인공지능 낭만의 시대(2010 이후) 논문들을 보면, 수학적 증명보다는 "이걸 이렇게 해서 최종 성능이 좋아졌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최종 성능이 깡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너도 나도 자기가 SOTA(state-of-the-art) 성능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논문들이 무한 생성이 되었는데, 사실 이 SOTA 성능이라는 게 0.1%만 더 좋아져도 그렇게 주장을 할 수 있고, 그리고 상황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서도 자기의 알고리즘이 더 잘 동작하도록 유도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점점 사람들이 SOTA라는 내용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은 "이걸 이렇게 해서 최종 성능이 좋아졌다"에서 "이렇게 한 게 이러한 현상을 보이고 그걸 수학적으로 증명하면.."이라는 중간 과정이 필수가 된 것 같다.


보통 학회는 8페이지 내외로 논문을 접수받는데, 이때 보충자료는 특별히 제한이 없다.


최근에 읽은 한 논문은 페이지 실제 본문은 8페이지인데, 이 보충자료가 52페이지라 총 60페이지에 육박했다. 그리고 그 50페이지는 대부분은 추가적인 실험이나 수학적 증명들로 가득 찼다.


이러한 논문을 볼 때마다 의욕이 떨어지고는 하는데, 점점 인플레이션이 심해져서 이 보충자료의 양이 그 논문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닌 가라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까 말한 불합격한 논문이지만 나는 분간 못했던 것 중에는 저렇게 60페이지에 가까운 친구들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에게도 해봤는데, 사실 뭐 다양한 의견들이 있고 그 누구도 좋은 논문이 무엇인가에 대해 절대적인 정답은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자기가 쓰고 나서 "이건 됐다"라는 느낌이 오는 논문들이 있다고는 한다. 아직 내가 좋은 논문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는 이유가 그 순간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일수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하루 무의미한 실험들만 계속 돌려놓으면서, 합격의 경계선을 넘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


그리고 또 고민인 부분은 이 좋은 학회에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알게 모르게 있기 때문에, 적당히 마무리하고 다음 연구로 넘어가지를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진행 중인 논문들만 계속 많아지고 있다.


그렇게 되니, 교수님도 점점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이런저런 제안을 하는데, 그 제안들이 또 부채로 계속 쌓여가고 있다.


그리고 조금 실적이 있어야, 자신 있게 영양가 없는 미팅이나 이벤트들은 쳐내고 할 텐데, 실적이 없으니 일단 그러한 것에 계속 끌려다니고 있다. 그렇게 끌려다니니 또 시간이 없어서 연구는 마무리가 안 되고 악순환이 시작됐다.



제발 이 악순환의 고리를 조만간 끊기를...


Photo by Unseen Studi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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