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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원 Dec 23. 2023

NPC가 되자

인간관계에서 감정 소모를 줄이는 법

노르웨이에서 진심모드로 살기 첫 번째 과제로 NPC가 되는 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NPC가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지만, NPC는 Non-Player Character의 약자로 게임 내에 상점이나 이런 곳에 위치한 캐릭터다. NPC를 클릭하면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긴 하는데, 사실 별의미는 없고 언제 가도 같은 이야기만 한다.


여기 오고서 처음부터 사람들 간의 대화에서 재미를 못 찾고, 대화를 하고 나면 항상 피로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이상했던 점은, 나는 MBTI에서 E로 시작하는데 한국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힘을 얻는데, 여기와 서는 만날 때마다 무슨 기 빨리는 것처럼 에너지가 소비된다. 다 그런 건 아닌데, 내가 교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런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이 재미가 없어서, 대화를 해도 에너지가 안 생기나 했었는데, 한국에서도 재미없는 사람들이라 대화를 잘했었던 걸로 봐서 꼭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비타민 D가 부족해서 그런가, 아니면 나도 현지화가 다돼서 사람들을 만나는 걸 싫어하게 됐나 생각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화의 지루함을 떠나서 대화를 하고 나면 약간 짜증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걸 갖고 역시나 다시 한번 여자친구에게 상담을 했다.


여자친구가 보통 대화가 어떻게 전개되냐고 물어봐서 몇 가지 설명을 해줬다.


대화 예시 1

상대방: 주말 잘 보냈어?
나: 아니 그냥 뭐 아무것도 안 했어.
상대방: 왜 아무것도 안 했어?
나: (여기부터 이미 피곤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냥 뭐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아무것도 안 했어
상대방: 왜 어디 하이킹이라도 가지?
나: 나 하이킹 별로 안 좋아해
상대방: 왜? 여기 하이킹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


대화 예시 2

상대방: 노르웨이어 잘 공부하고 있어?
나: 아니 안 하고 있어.
상대방: 왜? 어려워서?
나: 아니 그냥 별로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 왜?
나: 아, 뭐 주변에 다 외국인인데 별로 쓸 일도 없고 해서
상대방: 어 그런데 너 여자친구 노르웨이인이자나.
나: 아 여자친구도 별로 관심이 없어.
상대방: 왜?
상대방: 왜?
상대방: 왜?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뭔가 계속 대화를 하다 보면 뭔가 내가 계속 나를 변호해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그리고 꼰대 같은 애들도 많아서 자꾸 조언을 하려는 애들도 많다.


이 사례를 들려주니 여자친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여자친구: 네가 솔직하게 말하는 걸 중요시하는 건 알겠지만, 그냥 주말 잘 보냈다, 노르웨이어 공부하고 있다. 너는 어떻냐? 이렇게 물어봤으면 되지 않았을까?
나: 그런데, 진짜 잘 못 보냈고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데, 어떻게 가식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냐.
여자친구: 너는 그 사람들을 좋아해?"
나: 아니
여자친구: 그러면 왜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쓰는 거야? 그냥 NPC가 사람 대하듯이 대해!


평소에 가식적인 사람들을 워낙 싫어해서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 걸 싫어했었는데, 위의 대화들은 사실 두 번째에서 끝날 수 있었다.


상대방: 주말 잘 보냈어?
나: 응 잘 지냈어. 너는?
상대방: $%#$@#%
나: (안 들음) 오 그렇구나.


상대방: 노르웨이어 잘 공부하고 있어?
나: 응 조금씩 하고 있어 너는?
상대방: %$#$#@%@#$
나: (안 들음) 오 그렇구나.


처음의 나의 모든 답변들이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서 하이에나들 마냥 끝까지 물어뜯을 여지를 주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는 이러한 불필요한 대화의 여지를 잘 안 줬었는데, 노르웨이를 무슨 하부리그 마냥 생각하면서 평소에 주변 상황을 날카롭게 인지 안 하고 살다 보니 효율적인 삶을 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실 답변의 뉘앙스를 사람들이 파악해서 보통 "아무것도 안 했어" 이러면 아 이 사람이 지금 대화하기 싫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지를 하는데, (물론 눈치 없는 사람들은 위처럼 질문을 물고 늘어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다들 본인들 입장에서 외국어로 해서 뉘앙스를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눈치가 없는 건지 대화가 자꾸 처음 사례들처럼 진행이 된다. 그리고 약간 고약한 점이, 나만 느낀 걸 수도 있는데 이곳은 눈치 없는 사람들을 면박주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넌씨눈 이런 표현을 수출해야 할 텐데..) 오히려 면박을 주면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경우가 과거에 왕왕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항상 독불장군처럼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특히 불편한 어른들과의 대화에서 비슷한 패턴을 찾아보면,

어른: 너는 언제 결혼할 거니?
나: 아, 아직은 일이 더 좋아서, (아니면 아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
어른: 그래도 결혼을 젊을 때 해야 어쩌고 저쩌고, (준비돼서 결혼하는 사람이 어딨어 어쩌고 저쩌고) 추가질문, 추가질문, 추가질문....



사실 이 대화는 이렇게 끝냈어야 했다.

어른: 너는 언제 결혼할 거니?
나: 아 저도 빨리 결혼해야죠, 어르신은 몇 살에 결혼하셨어요?
어른: 나는 00살에 결혼했는데, 그때는 어쩌고 저쩌고
나: (안 들음) 아아 그러셨구나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절대로 흥미로운 답변을 처음에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말문이 막힐 정도로 흥미로우면 되긴 하겠다만.. 뭐 예를 들면 "저 정관수술해서 파혼당했어요!")


아무튼 최대한 지루한 답변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포인트는 역질문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질문하는 걸 너무 싫어했었는데, 이게 마치 관심이 없는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염려되서였다. 그런데, 약간 테니스나 배드민턴 같이, 공을 상대방에게 넘기고 나는 쉬고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한 마디의 질문을 했지만, 상대방은 그 질문을 위해 몇 마디를 하면서 설명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이 흥미롭건 흥미롭지 않건 사실 안 들으면 그만이다. (아~ 만 계속해도 된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선을 잘 긋는 사람들이 이러한 스몰토크에 도가 튼 걸 볼 수 있는데, 이게 오히려 에너지를 아끼는 대화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 모두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쓰도록 하자. 내 뇌를 거치는 답변은 아끼는 걸로.


Photo by Veni-Vidi Vin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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