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여행하면,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된다. 일행과 함께 일 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 주변의 말은 들리지 않지만, 혼자라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말들이 내게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면세구역에서 나를 시드니로 데려다줄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다. 늘 여유 있게 다니는 편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일을 나눌 수 없는 혼자 여행이라면 특히나 촉박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도 사실 면세점에서 뭘 사는 법은 거의 없다. 면세구역의 꽃은 면세점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면세점은 늘 그렇듯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고 내가 자리 잡은 곳은 북카페다.
공항 면세구역에 북카페라니 놀랍지만, 꽤 흥미로운 곳이기도 하다. 어쩐지 여행과 책은 제법 잘 어울리기도 하고.
북카페엔 여행객들이 많았다. 운 좋게 1인 좌석이 비어있어 앉았는데 옆 테이블엔 한 무리의 단체여행객이다. 칠십을 바라보는 연배쯤의 남녀 무리는 어린 시절 친구인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00이가 카톡방에 우리들이 만난 지 47년이라고 올렸잖아. 나 그거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벌써 그렇게 됐나, 세월이?”
“우리가 만난 게 47년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엊그제 우리 아들이 생일이라길래 ‘네가 올해 한 마흔 되었냐?’ 했다가 치매냐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들 나이도 이제 모르고 산다. 내 나이도 기억하기 싫은데 말이야.”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나 역시 가끔은 내 나이가 몇이더라, 딸이 몇 살이든가 한다. 이제 매해 달라지는 나이보다는 출생 연도로 말해야 더 빨리 이해되는 사람이 된 걸까.
즐겁게 떠들던 그들의 대화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친구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 녀석 있었더라면 우리 이렇게 다 같이 여행 못 간다. 다니는 건 걔가 제일 좋아했는데 말이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우리 여행 간다고 하면 따라오고 싶어 했을 거야, 아마”
그들의 왁자한 대화가 잠깐 끊겼다. 아마도 그들이 지금 추억하는 그 친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흘깃 그들을 보니 좀 전까지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진 채 저마다 다른 곳을 보며 생각에 잠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유쾌한 얼굴로 돌아갔다.
“화장실 사용료가 10밧이라더라.” “마사지는 받아야 한다.” “더 늙으면 이런 여행도 못 다닌다. 다들 할 수 있을 때 가서 즐겁게 놀고 와야지.”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탑승 시간이 다가온다며 일어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봤다. 남자 넷에 여자 둘이었다.
열심히 인생을 살고 다 함께 나이를 먹어온 그들. 그들 인생의 지나온 길이 모두 평탄하거나 다 같은 모습이었을 리는 없다. 지나온 길에 두고 온 회한, 꿈, 그리고 애써 손을 놓은 사랑이 왜 없었을 것이며 그 길에 흘리고 온 자신의 부스러기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알지 못하는 그들의 인생을 응원했다. 인생의 뒤안길이 아니라 앞으로도 걸어갈 눈앞의 넓고 환한 길이 그들 앞에 펼쳐지길 기원했다. 어느 공항의 쭉 뻗은 활주로가 보이는 창가에 혼자 앉은 나를 보고 또 다른 여행자가 내게 그런 응원을 보내줄 거라 믿으면서.
혼자 다니는 여행자는 이처럼 말을 꺼내놓지 않고 다른 이의 말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