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비안 Jan 30. 2018

오르고 내려가는

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모든 게 못마땅하다. 옆에 있는 이에게 짜증을 내보지만, 결국 내 탓이 된다. 한 번쯤 대충 넘어가지 않는 것도, 일 벌이는 것도, 누군가 도와줄 거라 기대하는 것도. 내 마음 같지 않다. 어떤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편에게 했던 ‘네가 어떻게 알아? 너는 내가 아니잖아’란 대사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건, 순간순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철이 없거나 대책 없이 발랄하다. 늘 버림받아도 또 다른 사랑을 꿈꾸는 로맨스 소설 속 여자처럼, 도대체 믿는 구석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믿는다. 이를테면, 조만간 근사한 책을 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사항 혹은 누군가 나를 인정해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만만함이다.  



 삶이 녹록지 않을수록, 그러니까 결심이나 노력에 비해 기대치나 결과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릴 뿐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한다. 유행어처럼 삶이 참 부조리하다고 읊조린다. 설렁설렁하거나 성큼성큼 다가갈 순 없을까? 이 불합리하고 시시껄렁한 상태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알베르 카뮈(이하 ‘카뮈’)’를 떠올린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재능이나 능력을 따를까, 아니면 본능과 의지를 믿어볼까? 나는 적어도 신성한 주문처럼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는 내가 감으로 신뢰하고 직관적으로 추종하는 존재다. 비록 이성적인 호감에서 시작됐지만. 생뚱맞게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연관된다. 만약 후자가 죽지 않고 성인이 되었다면 전자의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그는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내 마음을 흔들고 붙잡아줬던 존재였다. 그 당시 남자란 관심의 대상이기보단 못 미더운 거부감에 가까웠다. 그는 미지에서 똑 떨어진 완벽한 인간이었다. 부드럽고 사려 깊은 여성성과 강인하고 다부진 남성성에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통찰력이 빛났다. 그 모든 것이 예술적인 일탈 같았고, 나쁜 남자라고 하기엔 초월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기루였다. ‘싱클레어’처럼 흔들렸고 연약했던 그때의 나는 그런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러나,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자신을 이끌고 보호하며 심오한 정신세계로 인도해주는 벗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신의 완벽함을 바란다는 게 불가능함을 <이방인>의 ‘뫼르소’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상적인 형상으로 삶을 관통하고 달관한 방관성이란 현실밖에 있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무감정이 쌀쌀맞은 비웃음과 일맥상통한다. 그 냉소가 ‘뫼르소’에게 흐르지만 ‘데미안’에게도 발견된다. 다만 전자가 후자에 비해 인간이기에 모순적이다. 삶의 테두리 안에서 삐딱하게 타협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율배반적이고 배덕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때론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속인다. 그에 비하면 전자는 속이지 않는다. 대신 본능에 충실하고 느끼는 대로 행동한다. 그게 사회나 도덕적으로 모순적이지만 여과 없는 인간 본연의 것이기도 하다. 위선에 대한 반발과 반항, 물론 그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자신에 대해선 솔직 했고 거짓에 대한 조롱이 적어도 정직하다. 그렇다면, 가면 속에서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를 이해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우리는 뭔가 어긋나 있다. 그리고, 타협적인 누군가나 냉소적인 ‘뫼르소’, 혹은 그 안의 무수한 형상 중 하나로 살아간다.  



상형인 ‘데미안’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 건 그와 정반대인 ‘뫼르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실존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그것을 열심히 풀고 있는 디코더에게 매료된다. 과연 ‘카뮈’는 ‘뫼르소’였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일까? 나는 그가 궁금했다. 다행히도 책 어디에나 그의 얼굴이 실려 있다. 암호처럼 이해할 수 없는 미궁 속에 허우적거릴 때마다 그를 들여다봤다. 그는 정면이 아니라 삐딱하거나 조금 비껴선 모습이었다.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담배 한 개비를 물며 지은 옅은 미소가 세련된 멋을 풍겼다. 반항아 같으면서 동시에 소년 같은 천진난만도 엿보였다. 그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중적인 이미지가 그에 대한 단초였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부적절한 생각에 빠지는 이율배반적인 이치와, 이해할 수 없는 어긋남을 간파하기 위해 관찰자로 남으려는 의지를. 그래서, 주변인의 형상으로 인간과 문학과 삶을 이해하고 아우르고 있다. 머리 속엔 무언가 가늠할 수 없는 암호와 시니피앙을 떠올리고 세상사의 이치로 이해할 수 없는 틈을 연기 속에 뿜어낸다. 



의 연관어 중에는 부조리가 있다. 개념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지만, 단순히 일상적인 범주의 문제를 넘어선다. 삶의 의미와 현실 속에서 도저히 합일할 수 없는 불합리한 관계성이다.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완성형과 도달해도 또 다른 고지를 쫓아야 하는 허무함에 관한 것이다. 그의 책 <안과 겉>에는 죽기 전 안락한 무덤을 준비하는 노파가 등장한다. 그녀는 매주 그곳을 방문해 꼼꼼히 둘러본 후 흐뭇한 얼굴로 귀가한다. 그러다가 살아있는 현재와 죽은 후의 미래에 대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목격한다. 누군가 무덤 앞에 갖다 놓은 꽃다발 하나가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화려하게 죽을 그날을 꿈꿨건만 그러다가 일상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것이 그녀가 바랬던 것인가? ‘카뮈’는 하나에 꽂히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모순들, 태양과 그늘이 양립하는 세상에서 둘 다 가지기 어려운 부조리를 일깨운다. 양면적인 세상에서 이도 저도 포기할 수 없으면서 이기적이고 단선적인 행태를 꼬집는다. 



는 현대인의 삶을 시시포스의 신화 속에 빗댄다.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다시 떨어져 버리는 바위를 들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인생이다. 정상에 올라서야 하는 당위성과 굴러 떨어진 바위를 올려야 하는 비합리성의 굴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랐어도 다시 또 다른 정점을 찾게 된다. 지향점과 성공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은 또다시 시작되는 도돌이표 같은 범주 속에서 목표나 과정도, 예외나 우연, 시련이나 좌절 혹은 귀찮거나 흔들림 조차 필연적이다. 가끔씩 거부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다. 도달할 수 없고 완벽할 수 없는데 마음은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무언가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부조리하다. 과연 우리에게 이상적인 올바름이란 있을까? 그럴수록 깨닫는 건 없다. 오히려 한걸음 물러날수록 명료해진다. 



뮈’는 그것을 솔선수범한다. 그의 잘생긴 풍모 대신 번뜩이는 눈빛을 보라. 시선 끝에 걸린 관조적 응시를 볼 수 있다면, 그의 이야기가 분명히 이해된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파격에 해석과 평가가 아니라 숨은 그림을 터득하기를. 무언가를 억지로 규정하거나 재거나 반론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를 목격하길 놔둔다. 성실하고 꼼꼼하게 기록한 서사와 명제와 사유로 덧붙인다. 그 신실함은 학자적이고 종교적이며 아버지 같다. ‘수전 손택’은 그를 현대 문학의 이상적인 남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가란 흔히 남편 아니면 애인 중 하나인데, 믿음직하고 점잖은 관대함이 미덕인 그는 정확히 전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삶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던 외곬의 올곧음이다. 그러나, 그 험난 길을 자신의 탕아에게 넘겼다. 그를 관찰함으로써 신처럼 모든 것을 알아채고 인도하며 굽어 살핀다. 모든 영광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 갔듯이, 그의 업적 역시 페르소나 혹은 그림자 일지 모를 ‘뫼르소’의 몫일 것이다. 그가 평범한 길을 거부할수록, 우리가 그를 선이냐 악이냐인 이분법적으로 구분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바로잡으려 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갈망할수록 헛헛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무관심과 심드렁함에서 실마리가 나온다. 뻑뻑한 자전거 체인 같은 일상에 묵은 때를 벗기고 부식을 막아주는 윤활유처럼. 삶의 모순을 깨뜨리는 시행착오와 여지는 '카뮈'라는 아비를 가진 반항하는 인간의 몫이다. 



를 쫓으면서, 두 가지 생각으로 압축된다. 보이는 모습대로 직관적으로 판단하지 말 것, 충분히 곱씹도록 떨어져서 바라보고 생각해볼 것. 그 속엔 교집합이 있다. ‘카뮈’도 언급한 적이 있다. 용기, 빛이던 죽음을 향하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으면 안 되며, 집착하지 않고 비우고 초연 해지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반항하는 인간은 정오의 태양과 같은 인물이다. 가장 높은 곳에 떠서 만물을 비춘다. 일순간이고 한시적이다. 그 해는 다시 점점 기울어져 어둠 뒤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내일의 아침을 밝히기 위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뜨고 지는 반복 속에서 하루에 단 한 번의 정점을 허용한다. 섭리는 굴레 속에 있다. 우리는 가끔 그것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목표와 혼동한다. 엄밀히 과정일 뿐이라면 급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가보는 것이다. 천천히 한결같은 보폭으로. 오르면 내려가고 다시 또 오르고. 그것도 한편으론 용기다. 






뭐 하나 진득하게 해보지 못했던 내가, 현실적인 능력 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가꾸고 글을 쓰며 운동을 합니다. 부조리하기에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딛는 것이 용기입니다.
정해진 길은 없지만, 가다 보면 내 길이 생길 것이며, 그 자체가 스타일이 됩니다.
‘카뮈’는 그걸 말하고 싶었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할께, 기억해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