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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pr 10. 2018

반직선 위의 징검다리

26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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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의 <안과 겉>을 관통하는 정서는 흑백 대비이다.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순수와 쾌락, 관습과 일탈, 희망과 절망. 프라하 호텔에서 홀로 죽어간 남자와 베네치아의 따스한 풍광 속 대치처럼, 삶은 양면적이다. 텍스트를 읽는 내내 의구심에 시달리고, 그 반증을 주위에서 찾아보게 된다. 머리 속엔 밝고 건강한 웃음과 유쾌한 다과회가 떠다닌다.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가족처럼 티 없이 화목하다. 그러다가, 문뜩 할머니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그녀는 홀로 쓸쓸히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시각은 가족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죽음이 머물렀던 하루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오열과 좌절, 후회 속에 잠식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책과 공허에 빠졌다. 이건 이면과 마주한 일반적인 표현법이었다. 그러나, ‘카뮈’는 달랐다. 죽은 남편의 몫까지 짊어졌던 어머니와 무뚝뚝한 아들의 사랑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속하지 않은 듯 동떨어져 있고 어디에도 무게중심을 실지 않았다. 시소의 정중앙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힘을 배분하고 조정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냉정한 관찰자였다.  



순으로 감수성이 터지고 비우거나 메우는 과정 속에서 작가의 스타일이 드러난다. 흔히 그의 작품을 부조리의 문학이라 부른다. 그는 거울처럼 비추는 일상의 뒤편 혹은 주절거리는 언어 속 생략된 괄호를 파고든다. 그의 텍스트는 저 너머에서 기웃거린다. 보편적인 통념과 범주가 점 A에서 점 B까지라면, 대부분의 삶은 선분 AB 안에 있다. 딱히 불만 있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 답답하다. 어디서 어긋나는 것일까?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선분 AB 사이의 균열을 찾아서 과감히 파고든다. 껄끄러움에 부대끼고 간과하는 숨겨진 이분법을 깨닫는다. 이때, 점 B는 굴레를 벗어나 통념의 수위를 넘나 든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자는 멈출 수 없다. 낭떠러지 절벽 사이에 요정의 입김으로 보이지 않던 다리가 펼쳐진다. 저만치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길이 놓여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옛말과 달리, 머리가 아닌 마음속 호기심이 반응한다. 한보 전진한 순간 점 B를 넘어 뻗어나간다. 더 이상 삶은 선분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직선 위의 인간을 허용한다. 그는 한 번도 거론된 적 없는, 그래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이다.  



르소’를 보면서 느끼는 건 대체로 한 가지다. 양심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인 패륜아다. 그가 얼마나 부도덕한지 따지는 건 <이방인>에 관한 여러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파고들면 그러니까 한발 물러서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직선 상의 ‘뫼르소’가 보인다. 이를테면,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 앞에서 자식으로서 마땅한 행동과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사랑했냐는 질문에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하거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덤덤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슬픔을 보이긴커녕 끝나자마자 이제 드러누워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 자제가 필요한 순간 먹고 자는 일상적인 행위에 서슴없었다. 도의상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어쨌건 보통 사람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태도가 의구심을 낳았다. 현실에서 오해는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넘어가는 잣대였다. 설상가상으로 자기방어적 살인에 휘말리자, 그를 이상하게 여겼던 증언자들이 비정상적이라고 말했다. 장례식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문제였지만, 평소의 의욕 부진조차 거론되었다. 그를 향한 왜곡된 시선과 편향된 판단이 사실인양 형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견해를 반론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미국판 서문에서 작가는, ‘뫼르소’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즉, 부풀려진 오해를 풀기 위해 섣불리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덕이 아닌 반직선 상의 ‘뫼르소’를 사유할 수 있다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첫 등장부터 심드렁했다. 삶에 냉소적이고 초연했다. 설사 도리에 어긋난 듯 보일지라도 피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끝났다면 단순히 그의 스타일이라고 정의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 사건에 연루되자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우발적인 살인을 벌이는 장면을 살펴보자. 방어하기 위해 첫 발을 쏜 후, 강렬한 태양 아래서 비오 듯 내리는 땀방울이 시야를 가렸고 그의 뒤편엔 한가로운 바닷가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그림 같은 한낮의 균형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총알을 쏜 건 강렬한 햇빛이 평온함을 파고들어 죽은 줄 알았던 피해자가 꿈틀거리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밤과 낮처럼 완벽하게 구분된 이분법도 때론 팽팽한 긴장감이 무너지고 한쪽에 힘을 실었다. 순간적으로 흔들린다면 도덕적인 가치판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예외적인 침묵을 지나치지 못하고 깨뜨렸을 때 선분 AB에서 이탈될 것임을 눈치챘다. 감정의 불균형 속에서 강렬한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덧붙여야 할 변명거리나 보편적인 논리도 없었다. 단지 그걸 이해할 만큼 냉정 했고 세상의 잣대에 초연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거짓과 타협할 수 없었다. 차라리 범죄라고 치부될지언정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것을 선택했다. 다른 층위로 건너뛸 도약대를 향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마치 LP판에서 트랙을 튕기듯 반직선 AB로 뻗었다. 그것이 우리의 시야 속에서 선명해지는 순간, 대척점 상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행동과 생각, 의식과 무의식의 이원적인 생리를 적절히 통제하며 살아왔다. 아이 키우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면서도 가끔씩 혼자였다면 좋았을 걸 상상한다. 평생 엄격했던 아버지에게 사랑보다 감사와 의무감이 앞선다. 합리적인 직장 상사와 일해도 성취감보다 서운함이 더 많다. 그 진심을 어디까지 밝힐 수 있을까? 삶이 도덕적이어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것의 투명도를 적재적소로 조절함으로써 됨됨이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는 욕망을 누르고 상대적인 도덕에 맞추느라 헛헛하고 피로했다. 그게 당연한 선분 AB 속에선 그 실체를 알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버린 ‘뫼르소’를 통해서야, 신념 같은 정상에 대한 강박관념과 꾹꾹 눌렀 놓았던 신경쇠약이 감지됐다. 



호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관한 고찰은 <시지프(시시포스) 신화>으로 이어진다. ‘뫼르소’처럼 선분 AB에서 이탈하고 반직선 AB로 뻗어가는 인간 군상의 관찰을 통해서다. 영원한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이성과 도리에 대항해 죽음을 받아들인 ‘돈 주앙’, 타인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격화하는 <악령>의 ‘키릴로프’가 있다. 그들은 금욕적인 삶과 그 지향점인 신을 부정하고 인간적인 독립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반항심은 순간적 희열과 성령 속에 반짝 빛났다가 곤두박질친다. 고된 삶에 대한 의심과 영원할 수 없는 일회용품 같은 현실에 직면한다. 또, 무대 위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연기함으로써 일상 속 부조리를 보여주는 ‘연기자’, 패권을 무너뜨리고 인류애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정복자’가 있다. 그들은 무대와 유토피아라는 명분 속에서 가면과 투구 속의 자아로 태어난다. 무아지경과 혼연일체라는 목표가 있고 클라이맥스에서 환호와 추앙을 받는다. 감동과 공감은 오래가지 않고 한시적이다. 무대 뒤로 쓸쓸히 걸어 들어가 홀로 분장을 지우거나 안락한 왕좌 위에서 또 다른 침략을 두려워한다. 어떤 의미에서 오르막과 정점, 내리막이 있는 인생사와 다를 바 없다. 마치 바위를 온 힘으로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곧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처형된 ‘시시포스’의 운명이기도 하다. 


 

대기에 올라서는 도전과 다시 떨어지는 좌절은 결론적으로 이득과 손실의 총합이 무인 제로섬의 게임일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이 아니라 윤회처럼 되풀이된다면 어떨까? 올라가고 내려가는 과정 속에선 흔적이 남아 있다. 어쩔 땐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유난히 한쪽이 움푹 파여 다음번엔 훨씬 수월할 수 있다. 어떤 길로 나가는 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시도라고 풀이할 수 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러기 위해 자신의 냉정한 시선을 관철해야 한다. 선분 AB에서는 그걸 찾아낼 수 없다. 선분 AB 속에서 반직선 AB로 나간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지 모른다. 안주하지 못하고 또다시 나갈 것이다. 모호함이 해결되지 않는 삶을 용납할 수 없다. 불확실한 이상, 진리에 대한 의문과 해답 없는 침묵 사이에 대치 상태를 참지 못한다. 확신하지 못해 머뭇거리거나 부정하거나 막간의 피로감에 시달릴 수 있지만, 분명 어떤 가치를 이끈다. 종속된 긍정이나 총체적 신경증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항이다. 신념처럼 굳어버린 정상과 독단적인 도덕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원래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함으로써 권력의 세계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역사는 통념에 대항한 반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에 대한 인간의 반발인 종교 개혁, 개인 경험을 사상에 합류시킨 프랑스 혁명, 무엇이 옳은지 대립했던 이념 투쟁 등의 역사적 혁명이 있었다. 신과 기득권 대신 초인과 프롤레타리아라는 대리자를 내세운 형이상학적 투쟁도 있었다. 무엇이 주체가 되던 기존 세력과 혁명가의 대립은 또 다른 권력 탄생과 유토피아적 메시아사상으로 변주됐다. 원래로 되돌아가 선분 AB의 모순을 넘지 못하고 부모의 나쁜 습관까지 닮아가는 아이처럼 그대로 답습했다. 차라리 반항은 할 때 하더라도 역량과 여지를 넓히는 것이어야 한다. 안주하지 않고 의구심과 반발심으로 또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카뮈’는 예술에서 찾는다. 순수하고 긍정의 반항은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자는 형식과 내용에서 탈피한 채, 인간과 가치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통일을 갈망하는 현실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복종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충실한 미(진실)의 탐구는 어쨌든 현실적인 혁명을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다. 익숙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고독한 수행이다. 자신만의 논리를 지치지 않고 밀어붙이는 추진력이다. 외력에 흔들림 없는 결(스타일)로 극단적인 행동과 판단에 책임지는 희생정신을 포함한다. 목표에 도달했을 때 집착하거나 타성에 젖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무(無)를 무장해 또 다른 불의에 도전한다. 끝없는 시작이며, 그렇게 무언가를 결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범한 일상의 그늘 속에서 존재감 없었던 ‘뫼르소’는 균형이 무너진 태양의 빛줄기에 흔들렸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고행 길로 떠났다. 부조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감수성이라면, 흔들리고 의심스럽다면, 올곧고 자신만만해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누군가의 질타에 아랑곳없는 낯선 이정표가 될지 모른다. 다른 지점으로 도약해 ‘시시포스’처럼 굴러 떨어지더라도 감내해야 한다. 태양도 그렇다. 새로운 물결과 혁명이 한낮을 향해 달려가고 찬란한 정점을 찍었다가 의욕과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황혼의 저녁을 물들인다. 그 반복성은 떨어질 운명을 간직한 채 한순간의 빛이자 내일의 태양처럼 다시 떠오를 무한대의 에너지다. 영원한 순환을 위한 절도(節度)의 창조자이고 파괴자이다. 그걸 깨달은 자는 삶의 모호함을 알고 불확실한 통념과 싸우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출발한다. 내딛는 반직선 위로 징검다리가 차곡차곡 놓인다. ‘장 그르니에’가 말했던 결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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