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_리뷰에세이
<이방인>을 읽고 난 후, 대개는 패륜 아니면 정상참작이 가능할까 고민할 것이다. 그는 배은망덕한 구석이 있지만 의외로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나 그들 사이가 여타의 모자(母子)와 달랐기도 했다. 살인에 일말의 충동성이 있었지만 엄연히 방어적인 행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흥분한 친구가 사고를 칠까 미리 총을 뺐었다고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상(喪) 중에 애인과 밀월을 즐겼고 결혼 약속조차 없었다고 난봉꾼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살인자이니까 모든 의심을 결정적 증거로 추정하고 매도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칫 눈 밖에 벗어나면 도덕적 판단을 피할 수 없다. ‘뫼르소’ 같은 부류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스승 몰래 하지 말란 짓을 하거나 부모에게 책 산다고 돈을 더 타냈을 때 그냥 넘어갔다면 다행이다. 혹여 재수 없게 걸렸다면 한번 찍힌 낙인으로 줄곧 편파적인 마녀 사냥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 경험자는 이해타산적인 계산법을 금세 터득한다. 누군가에게 희생될 수 있는 역학적 회색 지대를 가급적 피할 것이다. 비슷비슷한 가면과 다소 속물적인 세상살이가 안전지대임을 깨달을 것이다. ‘뫼르소’도 쥐 죽은 듯 살아왔다. 예민한 감수성을 애써 드러내지 않고 꼭꼭 숨기면서. 그러나, 현실적인 인간이라면 도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어둠과 호기심을 만났다. 강렬한 빛 속에서 환영에 사로잡히고 의식이 흔들린 채 심연의 유혹을 감지했다. 문제는 살인과 연결된 것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었다. 살인이라는 명확한 표현(기표)과 도덕적 잣대(기의)를 달리 말할 수 있을까? 설사 정상참작된다 쳐도 평생 죄라는 허울 속에 갇혀 지내야 한다. 그림자조차 허용하지 않는 밝음 속에서 알 수 없는 모호함이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왜 남다른 감수성을 비정상이라는 낙인과 타협해야 하는가? <이방인>의 방점은 이방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 판단에 숨겨진 상대성을 주목한다. 정상 여부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바로 정의(正義)에 있다.
정의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개인과 사회의 공정한 도리이거나, 바른 뜻 혹은 곧은 의지를 말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델(이하 ‘샌델’)’은 구분 없이 맞물린다고 본다. 정의는 줄곧 행복, 자유, 미덕을 추구해왔다. 현대 민주주의 역사는 자유를 규정하거나 보장하기 위한 정의의 고군분투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했던 공리주의부터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의 극대화를 끌어내려는 자유지상주의, 자율적 존재로서 도덕적 의무를 행해야 하는 칸트주의, 공정한 계약과 분배를 통해 정의로워야 한다는 평등주의가 있었다. 이들은 행복과 자유에 집착하느라 정의를 일상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 무심하게 흘러가게 했다. 도덕적 의무나 분배의 문제로 거대해진 정의는 흔히 선행이나 흔들리지 않는 뚝심과 동격처럼 됐다. 종종 인간 본연의 의지나 미덕을 슈퍼히어로 표상한다. 혼란한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거울 속을 뚫고 나와 어지러운 무언가를 바로잡길 바라면서. 도덕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대신 구원을 선택한 셈이다. 구원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누군가와 더불어 하는 미덕은 존재했으나 암암리에 서로를 비교하는 상대적인 잣대도 여전했다. 왜냐하면, 정체성으로 존재하고 도덕적 가치관으로 판단하니 계층 간에 틈이 벌어졌다. 마땅한 도리를 이해하면서도 개인적인 의지를 불신했다. 여기에 ‘샌델’은 서사적 존재성을 덧붙인다. 가까이론 가족의 의무이고, 멀리 보면 애국심 같은 것이다.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성은 관찰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국민이 직접 공적 삶에 꾸준히 관심과 경청, 개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개인과 사회, 자유와 권리에 대한 상호존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샌델’의 서사는 결국 올바른 도리와 개인 의지가 완벽히 대칭을 이루는 무결점 도덕에 집착한다. 정의는 개인이나 사회적 가치관 속 선분 AB에 머물러 있다. 개인의 심지가 좀 더 뻗어나갈 가능성이나 창의성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어쩌면, 정의는 현실적인 것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그 밖의 감성과 이상을 일탈이란 여집합으로 만들어버리는지 모른다. 공정함에 집중하다 보면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순수한 개인 의지는 도덕적 딜레마가 돼버린다.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적 실천 의지인 실천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어떤 것을 선천적으로 인식하려는 순수 이성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했다. 실존적으로 선분 AB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반직선 AB를 향한 의지는 분명 존재한다. 그건 가치 판단이 아니라 인식론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뫼르소’가 한치의 오차 없는 태양 속에서 잠시 일탈했던 유혹은 이 세상과 다른 행보이며 반직선 AB의 탄생이다. 비도덕적이고 정의에서 벗어났으며 비정상이긴 하지만. 왜 그는 이방인을 자처했을까?
‘뫼르소’는 선분 AB를 벗어나 자신만의 반직선 AB로 나간다. 그 맥락은 분명 다른 텍스트에서도 본 적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그랬다. 그는 속세를 등지고 동굴 속에서 수련하다가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왔다. 신에 대한 강요와 약간의 흔들림, 어떤 불신이 번복될 때마다 외쳤다.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신은 죽었다.’ 동정은 돕는다는 미명 아래 무엇이라 판단하고 규정 지음으로써 상대적인 약자로 만드는 과정이다. 가진 자는 베푼 만큼 누리고, 못 가진 자는 구원받길 원한다. 재화의 차이로 평가하고 수치심을 느낄수록 불화의 씨가 싹튼다. 불평등과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망상은 우리가 신을 허용한 원동력이다. 종교는 신의 뜻인 양 좌지우지하면서 우리의 의식과 몸에 신이란 마취제로 꽂아버린다.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할 자발성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창조를 강조한다. 창조하는 사람은 더 나은 가치를 위해 기존의 관념을 깰 수 있는 용기를 가지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치시킬 수 있는 미감(美感)을 찾는다. 삶이란 각자가 느끼는 감성과 누군가 부여한 기호를 둘러싼 싸움이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 창조할 수 없기에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감수성에서 힌트를 얻는다. 그게 발달할수록 자기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만물의 기운을 전달받는다.
자기 의지로 길을 찾는 사람, 구도자는 납득할 수 없는 통념과 이율배반적인 잣대에 매달리지 않는다. 상대적이고 편파적이어서 구심점을 흔드는 가치관은 진리가 아니다. 믿음만 강요하고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적대감,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력의 영이다. 인간이란 무릇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이나 규제가 가벼울수록 실패나 역경을 덜 두려워한다. 자유분방할수록 틀에 구속되지 않고 미련 없이 행동한다. 아이의 놀이처럼 거짓 없이 솔직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착하고 더 악하라고 가르친다. 최고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고의 악이 필요하다. 예수가 자신의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원죄를 인정하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구도자는 낮과 밤, 아침과 저녁을 가르고 최고로 깨닫는 순간 몰락을 예고하는 정오의 혼돈을 사랑한다. 수련의 고독과 깨달음의 고통에서 자신의 의지를 밑바닥까지 추락시켰다가 훨씬 가벼워진 정신으로 비상한다. 그가 주장하는 초인은 인간의 심연에 미끼를 던지는 어부이자 조금씩 가벼워지며 비상하는 춤추는 자이다. 내면의 짐승으로부터 무지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정신적 성숙과 용기로 내딛는다. 그는 속박과 수수께끼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길을 떠나라고 권한다. 개인을 자유로운 존재로 촉구한다는 점에서 능동적 의지를 일깨운다. 만약 여기가 아닌 반직선에서 찾아야 한다면 설득하는 대신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 처음 내딛는 곳엔 오롯이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우리는 ‘뫼르소’가 못다 이룬 반직선 AB를, 보다 초인적인 ‘차라투스트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묵시록처럼 다가와 누군가에게 로망이 된다. 거룩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심연 속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는 길 혹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초대할 것이다. 어쩌면,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 속 풍경일지 모른다. 거미집 사이나 나무 말뚝 위 공중 계단으로 이어진 도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 가운데 우물처럼 깊은 광장이 있는 도시, 혹은 호수 위에 세워 모든 일이 거울 같은 그 속에서 반사되는 도시는?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반직선 AB을 불러들이는 듯하다. 그는 그것을 거대한 제국을 소유한 ‘쿠빌라이 칸’에게 설명한다. 언어가 아닌 몸짓과 기호, 동물의 울음소리 혹은 여행지에서 가져온 사물로 소통한다. 그들 사이엔 이방인과 지도자, 서양과 동양, 낯섦과 익숙함이라는 도식이 있다. 선분 AB의 후자는 이해할 수 없어도 구현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신기루에 매혹된다. 미지의 세계는 존재할까? 누구나 갈 수 있을까? 의심과 열망은 반직선 AB를 끌어당긴다. 그럴수록 좁혀질 수 없는 영원한 대치성 사이에 빈 공간과 닿으면 터질 것 같은 공기 방울이 떠다닌다. 여백은 반직선 AB와 선분 AB 사이를 가로막는 평행선이자 긴장감이다. 서로를 알지 못할 때, 아무리 닿으려 해도 좁혀질 수 없을 때 팽팽해진다. 의미에 대한 호기심, 상상하고 싶은 미감, 감춘 걸 드러내는 명료함을 갈망한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확인하려 들고 ‘마르코 폴로’는 상상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꿈같은 도시라고 한다. 욕망과 두려움, 비밀스러운 것이다.
선분 AB에 있는 자는 반직선 AB를 자신의 방식대로 가늠한다. 파악했다고 해도 선분 AB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일장춘몽이다. 여백과 긴장감이 사라지는 순간 과도한 욕심이 생긴다. ‘쿠빌라이 칸’은 그것까지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반직선 AB으로 뻗으려는 야망은 불가능한 불행의 단초다. 해석하고 상상한 걸 끊임없이 확인하는 그에게, ‘마르코 폴로’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선분 AB의 언어, 혹은 도덕과 정의로 표현할 수 없다고. 그럴수록 원 의미가 퇴색된다. 자칫 왜곡된다. 휘발되어 날아가버려 영원히 잃게 되거나 잊혀질 수 있다. 왜 굳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가? 왜 빈자리를 채우고 포장해야 할까? 선분 AB의 정의와 반직선 AB의 구도는 교집합이나 타협점이 없다. 두 평행선 사이는 여백이다. 도저히 맞닿을 수 없는 공존이다. ‘마르코 폴로’는 영원한 평행선을 함구했다. 태양과 그림자의 이분법적인 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들-‘마르코 폴로’, ‘차라투스트라’와 ‘뫼르소’-은 기준도, 이상도 뛰어넘은 상징이자 창조자이다. 어두운 공간 속을 뚫고 나가는 반직선의 결을 따라 횃불(구심점)을 밝힌다.